2024년 5월 26일 일요일

<연경, 북경, 베이징>

 <연경, 북경, 베이징>


1. 북경 현황 - 맑은 공기, 남아도는 젊은 인력, 외국인 관광객 없음


지난 주말 금토일 잠시 중국 북경에 다녀왔습니다. 남중국은 가끔이지만 북경은 25년만이었어요. 북경을 자주 다녀온게 아니기 때문에 historical 비교는 어렵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지역과 이런게 다르다 이런거만 얘기할 수 있겠죠. 다만 느낌만 좀 정리해 드린다면..


- 공기가 맑았습니다. 다녀온 주말은 특히 맑았아서 서울과 비슷했습니다. 올해 봄 내내 공기가 서울보다 조금 더러운 정도여서 에어퀄리티 지수는 서울이 60-100 사이인데 북경은 60-140 정도 나오네요. 공장을 안돌려셔인지, EV 전환 때문인지, 고비사막에 나무를 많이 심어서인지, 올해만 이상기후인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튼 우리도 올해 먼지 걱정 없이 봄을 지냈죠.


- 외국인 관광객은 진짜 없어서 공항 국제터미널은 텅 비어 있습니다. 관광객도 동양 뽕 맞은 일부 서양인 아니면 전부 다 내국인. 반면 국내선 터미널은 북적북적. 코로나 이후 특히 심해진듯


- 디스인플레 압력은 여전한 것 같네요. 물건은 넘쳐서 판매점은 항상 뭔가 할인행사를 합니다. 헤어샵에서는 헤어디자이너는 3명 손님도 3명인데 조수는 10명이 넘어요. 젋은 실업이 넘쳐납니다. 그래서인지 음식배달은 갈 때마다 더 발전해 있습니다.


- 여전히 중국 여행은 어렵습니다. 알리페이 띠디추싱 현지폰번호 위챗 VPN 꼭 세팅해야 되고 비자 받는것도 큰 일이고 현금결제도 영어소통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단순 자유여행이라면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도 매력이 있어서 자주 가게는 됩니다만..



2. 북경의 위치 - 농경문화의 북쪽 최전방 기지


북경은 고대 중국에서는 원래 유목민의 지역이었습니다. 전국시대 연 소공이 북쪽 영토 끝으로 이주하며 한족 농경민의 정착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경의 원래 이름은 연나라의 수도라는 뜻인 연경이었습니다. 중국 중원에서는 북동쪽 끝 가장 먼 지역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제일 변방 도시가 지금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북경 바로 북쪽과 서쪽은 산지이고 동쪽은 바다이며 산을 넘어야 동북쪽 만주와 연결됩니다. 산넘어 북쪽 몽골고원에는 흉노, 돌궐, 몽골과 같은 투르크-몽골계 유목민들이, 동북쪽 만주에는 거란, 여진(만주), 고구려, 말갈과 같은 퉁구스계 수렵농경민들이 살았습니다. 북경 근처의 연나라 지방에서는 중국 한족 문화와 북방 유목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났습니다. 


북경은 한족 농경민들의 최전방 전초기지인 동시에 유목민족에게는 남쪽으로 약탈하러 가는 관문이었습니다. 한족은 산맥을 경계로 장성을 쌓았습니다. 진나라때부터 장성을 쌓았지만 명나라때 특히 다시 쌓았습니다. 송나라는 연경의 관문을 확보하지 못해 북방민족이 내려올 때마다 방어할 지형지물이 없었고 항상 털렸습니다. 명나라는 장성은 잘 관리했고 북방민족으로부터 국경을 방어해냈지만 남쪽으로부터 올라온 농민 반란군이 자금성을 함락시켰고 결국 임진왜란을 틈타 힘을 키운 동북의 만주족에게 스스로 장성 동쪽 끝 산해관 관문을 열어주었습니다.



3. 서방/북방유목민 문화- 중국 중근세사에 깊은 영향을 남김


바닷길이 열리기 전 선진문화는 서쪽 사막길을 건너 전파되었습니다. 수도는 서쪽 끝 사막길에 가까운 장안에 있었습니다. 동방은 아직 문화가 일천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북방 유목민은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삼국지시대 이후 북중국이 유목민에게 털린 5호16국 남북조 시대를 지나 수당이 통일했지만 왕실과 지배층이 유목민 출신인데다 문화는 역시 서역 스타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에 가면 남중국의 자본주의적 행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에 가까운 상업민족인 반면, 북중국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데 이게 또 역사적인 연원이 깊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송대 이후 남중국으로 바닷길이 열리면서 사막길의 중요도는 떨어졌지만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유목민의 침입은 더욱 강해져 송은 내내 북쪽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연경과 북쪽 관문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당 멸망 이후 북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북방민족은 현재의 북경을 포함한 장성 내외의 지역을 연운16주라고 하여 합병했고 북방에서 중국으로의 관문은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송은 남중국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고 송원대에도 중국 절반의 주인은 유목민 계열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청나라도 유목민 계열이 지배했습니다.


4. 북경 천도 이후 가까워진 중국-조선


유목국가이면서 북중국을 점령한 여진족 금나라는 수도를 유목계와 정착농민의 경계지점인 연경으로 결정했습니다. 몽골이 중국 전역을 점령하고 나서도 연경 수도 방침을 이어갔습니다. 북방의 국경도시로 시작된 연경은 이제 북방의 국제도시가 되었고 이름도 대도로 고쳤습니다. 북방 유목민/서쪽 색목인(서역인)/남방 한족 농경민이 함께 살던 도시였고 몽골에 점령당한 동방의 고려인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고려 출신 기황후가 대도에서 힘깨나 썼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명나라는 간신히 몽골을 장성 밖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회복했지만 북방민족은 여전히 강했고, 명나라 북쪽 방위를 책임지던 홍무제의 넷째 왕자 주체는 남경을 함락시켜 황제가 되고는 수도를 북방 방위거점인 연경으로 옮겼습니다. 남경에 대응하는 의미에서 이름은 북쪽 수도, 북경으로 정해졌습니다. 중국 한족의 경제의 중심은 당나라 떄 이후 그제나 저제나 남중국이었지만 정치 중심은 북경으로 이동했습니다. 


중국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부터 조선과의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그 전까지 중국이 장안, 개봉, 항주, 남경 등지에 있었을 때에는 중국은 멀고 큰 나라였습니다. 북으로는 거란 여진 유목민에 길이 막혀있고 바다를 통해 건너야 했지만 이제는 수도간 육상 거리가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당과 가까웠지만 바다를 건너 저 먼 서쪽의 장안까지 가야 했고, 송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로부터 찬탈한 조선왕실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명에 충성했고 조공사절은 자주 다녀갔으며 명은 일본의 침입을 보고 조선 출병했습니다. 


청 황조 때도 조선과의 표면적인 관계는 가까워 조공사절이 자주 다녔고, 박지원은 북경에 사절로 갔다가 건륭제가 북쪽 열하의 별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정에도 없던 열하까지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 여정을 열하일기라고 기록했습니다.


청나라 시절 서방 문물은 의주를 통해 들어왔고 조선에서 지역차별을 받던 서북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평양 의주를 중심으로 한 서북 기독교인은 한국 근현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도 서북 기독교인 출신이고 숭실대학교는 원래 평양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서울-북경의 직선거리는 서울-도쿄보다 가깝습니다. 북경이 중국의 수도인 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사실입니다.



5. 자금성에서 중난하이-천안문 광장으로


청 황조 중국의 정치는 역시 북경에서 이뤄졌으나 중요한 문제는 남방의 끝 광저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청 황실은 서양 문물 도입을 성공하지 못하며 붕괴되었고 자금성의 주인 푸이는 궁궐에서 쫓겨나 만주국에서 옹립되며 영화 마지막 황제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의 정치는 자금성에서 중난하이와 천안문 광장으로 옮겨졌습니다. 5.4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 등 인민이 나선 정치 이벤트는 천안문광장에서 발생했습니다. 한반도에서 3.1운동이 있을 동안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발생했고 이후 중국 인민은 현대중국 건설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북경에는 황제는 없어졌지만 1900년 즈음 북경대 청화대 2개의 명문대학이 생겼습니다. 대학생들은 이후 학생의 정치참여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변법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북경대학의 학생은 사회 참여를 주도했고 인문계의 최고 명문대가 됩니다. 미국이 전쟁 배상금을 받지 않고 대신 대학을 지으라며 설립된 청화대는 모택동 시대 공대 구조조정을 거치며 이공계의 최대 명문이 되었습니다.


중난하이(중남해)는 자금성 서편 호수와 정원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원세개(위안스카이)가 북경을 장악한 이후 정부 수장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캐피톨 힐, 한국의 (구)청와대와 같은 느낌입니다. 원세개, 모택동, 등소평 등 중국의 권력자는 중난하이에 거주했습니다. 신중국의 패권을 두고 북중국의 북경과 남중국의 남경이 경쟁했으나 북중국이 승리했고, 남경에 있던 장개석은 일본군에 밀려 충칭으로 도망갔다가 대만으로 재차 도망갔습니다.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한 이래 공산당 내부에는 우파와 좌파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주석 모택동은 좌파, 부주석 주은래는 우파의 상징이었습니다. 인민공화국 역사상 전반적으로 우파가 약세였는데 주은래, 호요방(후야오방), 조자양 등 우파 정치인들이 핍박받을때마다 그들을 지지한 것은 북경의 대학생들이었고 그들은 천안문 광장에 나왔습니다. 


89년 6/4 천안문사태 이후 천안문광장은 금기어가 되었고 정치행위는 억압받았드며 이번에 가서 봤을때는 자금성과 박물관을 보려는 내국인 관광객들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등소평은 우파 좌파간 갈등을 잘 이용하며 개혁개방을 이어갔지만 그런 조정을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등소평 뿐이었습니다. 이후 장쩌민의 상해방, 호요방의 후계자들인 공청단 등이 권력을 다퉜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좌파적 개혁을 내세운 시진핑이었습니다. 남쪽에서 개방과 산업화와 무역과 부동산 붐이 이어지는동안, 북경에서는 중국의 방향이 이렇게 결정되었습니다. 중난하이에는 여전히 시진핑 주석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2024년 3월 17일 일요일

<콩, 장, 한반도 그리고 두부>

 <콩, 장, 한반도 그리고 두부>


1. 도우장, 중국인의 아침식사


중국에서 직구로 도우장 기계를 샀습니다. 한국에서 10만원 하는걸 직구로 2만원이면 사네요. 한국에서 파는 것도 중국 OEM 제조니까, 직구가 늘어날수록 중국 제품을 떼어와서 브랜딩 마케팅해서 한국에 파는 직업은 자리가 없어진다고 봐야겠습니다.


도우장(豆漿, 두장)은 한자 그대로 콩즙, 콩물, 콩국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사람들은 여기에 기름에 튀긴 꽈배기 요우탸오(油条)나 만두, 교자를 곁들여 아침식사로 먹습니다. 20여년 전에 중국어 과외선생님을 따라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콩물과 꽈배기를 사서 간단히 먹는 중국인의 아침식사 습관을 처음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둘 다 처음 보는 거였으니까요.


2. 단백질을 주는 콩, 공기 중에서 질소를 뽑아올 수 있기 때문


식물의 3대 비료가 질소N 인P 칼륨K 이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이게 필요합니다. 인은 뼈나 DNA(DNA내에 인산이 필요합니다), ATP(세포 내 에너지 저장소)에 인이 들어가고, 칼륨은 생명체 내에서 나트륨 등 전해질 농도를 조절하는데 필요합니다. 질소는 그 복잡한 구도 덕분에 생명체의 기능을 제어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구성원입니다. 질소라는게 탄소처럼 이쁘게 결합되질 않고, 다른 분자와 결합할 떄 각도가 삐뚫어지게 되어있어요.


질소, 인, 칼륨보다 더 많이 필요한건 당연히 탄소C 수소H, 산소O 지만, 이건 물(H2O)을 마시거나 광합성(CO2)을 해서 얻을 수 있으니, 456등으로 필요한 NPK가 3대 비료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인과 칼륨도 얻기가 어렵지만, 질소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질소는 공기중에 엄청 많지 않냐? 할 수 있지만 공기중에 있는 질소는 지들끼리 결합해 있어서 아주 단단한 질소분자 N2 형태입니다. 이걸 질소 하나만(질소 이온) 뽑아와서 생명체가 쓰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버-보슈가 암모니아 비료를 만들기 이전, 생명체는 질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다른 생명체의 사체를 통해 얻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물이 죽어 쌓인 퇴적 토양이 비옥한 것이었고, 땅에 질소를 주기 위해 배설물을 비료로 줬습니다. 비료 없이 농사만 지으면 땅에서 NPK가 소멸되고 그러면 지력이 다 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비료 외에 생명체가 질소 이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번개가 치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에너지가 강해서 질소 분자가 쪼개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콩입니다. 콩의 뿌리에는 박테리아가 살고 있는데(뿌리혹박테리아), 이 박테리아는 무슨 영문인지 질소 분자를 쪼개서 수소에 붙여서 암모니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게 만들어지면 생명체는 이걸로 아미노산, 그리고 단백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콩은 그래서 뿌리혹 박테리아의 도움을 받아 단백질을 자체적으로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식물 중에서는 단백질 함량이 제일 높고, 지력이 떨어진 땅에 콩을 키우면 지력이 회복됩니다.


3. 콩의 원산지는 만주, 쌀 문화와 결합한 콩


밀은 터키 서쪽 산간지대, 쌀은 동남아시아나 인도가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콩은 의외로 한반도 바로 근처, 북한과 만주 일대에서 작물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역사와 아주 인연이 깊습니다.


수렵민족인 고구려인은 사냥한 고기에 콩으로 만든 장을 바른 다음 불에 구워먹었다고 전해집니다. 맥적이라고 불리는 이 요리는 아마 지금의 바싹불고기?와 비슷할 걸로 생각이 됩니다. 바싹불고기 별로 안좋아하긴 하는데... 콩을 단기간 발효시켜 만든 장인 청국장이 청나라에서 왔는지 어쩄는지는 학자들이 논쟁중이지만 여튼 청국장도 근원은 만주, 한반도 북부로 추정됩니다. 뭔가 좀 친근한 느낌이 있죠..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는 메주도 만들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큰 항아리에 장을 담가 보존하고 삭히는 문화는 사실 중국에서 기원했습니다. 만주의 콩 문화와 중국의 독 문화가 합쳐져, 콩을 항아리에 발효시켜 장, 소스를 만드는 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동아시아 농경문화에 2가지 장점을 보태주었는데, 일단 하나는 음식이 맛있어졌다는 것입니다. 단백질 자체도 맛있지만, 단백질이 분해되어 아미노산이 되면 혀에 감칠맛을 자극해 맛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고기 없이도 감칠맛을 낼 수 있는 재료는 콩, 다시마 정도 뿐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목축이나 낙농 없이도 단백질 공급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동남아/인도에서 시작된 쌀농사는 후덥지근한 여름 몬순 기후 지방에서 수확량이 많고 맛이 좋아 동북아시아까지 급속하게 퍼졌는데, 단백질 함량이 낮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시아 농민들은 단백질 보충을 위해 논에서 나는 민물고기를 수확철마다 논에 물을 빼고 잡아다가 장을 담그거나(젓갈, 피쉬소스), 개나 닭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고 콩은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었죠. 


특히 한국에서 장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밀과 면도 소비한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은 식단이 쌀밥+나물+김치로 고정되면서, 쌀밥을 더 맛있게 먹고 단백질도 공급할 수 잇는 식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나물 좀 뜯어서 넣고 된장을 푼 된장국은 영양 면에서도 맛에서도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중국이 밥을 기름에 볶아서 먹고, 일본이 밥에 뭘 덮어서 먹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한국은 밥을 국에 말아서 먹고, 그래서 숫가락도 쇠숫가락을 쓰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모두가 콩 덕입니다. 


4. 우유로 치즈를 만들듯이, 콩물로 두부를 만들다


두부를 만드는 방법은 잘 아실겁니다. 콩물에 마그네슘 등이 섞인 간수를 넣으면 단백질이 서로 붙어 응고됩니다. 단백질끼리 붙어 가라앉으면서 물은 빠지고 엉겨붙은 두부만 남습니다. 이건 의외로 치즈를 만드는 방법과 거의 같습니다. 


치즈도 단백질 물인 우유에 단백질을 엉기게 하는 효소(레닛)을 넣어서 단백질을 굳힌 것입니다. 단백질만 빠져나오면 치즈가 되고, 치즈가 빠지고 남은 물은 유청이라고 해서 먹던지 여러가지로 따로 씁니다. 우유에서 두부처럼 단백질을 굳힌게 치즈고, 우유에서 거품을 걷어내서 기름만 따로 뺴낸게 버터입니다. 둘은 아예 다릅니다.


치즈가 발효식품 어쩌고 하는건 이 이후의 일입니다. 굳어진 단백질은 당연히 온갖 생물의 먹잇감이 되고, 오래 보관하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균에게 맡겨두는게 그나마 나은 방법입니다. 두부도 오래 저장하기 어렵고, 발효를 시키면 좀 낫습니다. 두부를 발효시켜서 먹기도 합니다. 취두부라고... 사실 후랑스 이태리 치즈 똥냄새는 좋다고 하면서 중국 취두부 썩은내는 미개하다고 싫어하는 것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넘이 그넘입니다.


두부는 사실 꽤 최근에 생긴 음식입니다. 치즈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것과는 달리.. 하지만 둘의 만드는 방법은 너무 비슷합니다. 명나라때 조선 두부가 괜찮았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 전에는 두부 얘기가 잘 안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몽골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꼭 몽골 떄문이었는지, 아님 그 전부터 있었는데 몽골 점령 떄문에 퍼졌는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심증은 있습니다. 치즈와 두부는 만드는 방법이 너무 꼭 같으니까요.


우동, 교자 같은 것들이 중국에서 직접 일본에 전해진데 반해, 두부 제조 방법은 도자기 등과 함께 임진왜란때 많이 한국에서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납치와 강제력으로 넘어갔겠습니다만.. 이제와서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두부를 더 열심히 만들고 소비합니다. 반면 한국은 치즈 올려먹는게 유행이라 일본에서 한식은 매운 요리에 모짜렐라치즈를 얹는 거라고 하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양넘들이 열심히 되도않는 fake meat 개발을 고민할때 우리는 두부가 더 낫지 않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욘드미트고 나발이고 두부김치나 드셔봐..

2023년 4월 9일 일요일

큐슈 이야기

 

1. 일본의 입구, 큐슈

1) 빛은 서방으로부터

큐슈는 일본의 가장 서쪽이면서 대륙과,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가까우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좋은 관계로, 때로는 악연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의 중심이 근세 이전까지는 교토(간사이), 근세 이후부터는 에도(도쿄)가 중심이 되었다면, 그 전 고대 시대의 중심은 큐슈였습니다. 빛은 서방으로부터 왔습니다. 이건 사실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마찬가지이긴 했습니다. 문명이든 불교든, 육로든 해로든, 빛은 문명의 개화가 빨랐던 서방으로부터왔고, 특히 고대의 선진문물이었던 불교는 서쪽 인디아로부터 왔으니까요.


2) 백제와 큐슈

이 시기 한반도는 중국애서 한국으로 그리고 그걸 다시 일본으로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왕인 박사라던지.. 역사책에 많이 나오는 얘깁니다.

백제는 개로왕의 대패 이후 한강 유역을 잃어버리고 금강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을 털렸죠.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하느냐의 과정에서, 일본의 힘을 빌린 것도, 중국 남조와의 관계를 확보한 것도 부흥 요인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기에 중국 남조.. 중국도 북쪽은 유목민계열에 털리고 남조만 유지되는데 그 남조와 해양 교류를 하며 한반도 삼국 중 중국 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그러니까 요새말로 테크트리를 빨리 올린.. 그런 성과를 가져왔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전북 익산, 그러니까 백제의 마지막 도시 출신이고, 아내는 잠실 올림픽공원, 백제의 첫 도시 위례 출신이라 백제에 대해 좀 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 백제의 웅진 시기의 부흥을 이끈 무령왕은 일본 출생이고, 그 이후에도 백제왕실과 일본의 관계는 각별합니다. 이후 사비성에서는 방계가 왕위를 이어받는 사이 오히려 임성태자와 같은 백제왕실은 일본에 정착, 이후 전국시대 주요 다이묘인 오우치 가문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백제 이전에도 전남 나주 등지와 규슈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전방후원군 고분이나, 한반도의 영향이 있어보이는 큐슈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 등... 큐슈와 한반도 남쪽의 관계는 따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빛은 한반도로부터, 가장 서쪽인 큐슈로 왔습니다.


2. 견당사의 출발점, 하카타

1) 백제와 신라

여튼 아는대로 여차저차 백제는 망하고 일본 입장에서 적국인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지금의 후쿠오카 동부는 이전에 하타카(박다) 라는 이름으로 불린 항구였습니다. 신라의 침략이 걱정된 일본은 하타카에서 한참을 내륙으로 물러난 관문에 성을 쌓고 해자를 둘러 미즈키(수성)이라 불렀고, 그 뒤에 큐슈의 관청 다자이후(대재부)를 두었습니다. 

이후 백제인은 일본에서 활동을 이어갑니다. 큐슈지방을 거쳐 간사이 지역에서 아즈카 시대를 거쳐 나라의 귀족 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백제를 일본어로는 구다라.. 라고 읽는데 어원은 불명이나 백제=큰 나라 에서 구다라 라는 말이 왔다는 설이 우세하며, 나라 시대의 수도 나라는... 우리말 '나라' 에서 왔다는 설이 우세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2) 견당의 시대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사 거장 에즈라 보걸은 이 시기를 일본이 중국에 배웠던 시기라 표현합니다. 1880년이 되면 다시 중국이 일본에게 배우게 되지만 청일전쟁 이후가 되겠지요. 일본은 신라 통일로 관계 껄끄러워진 한반도보다 직접 당나라와 교류할 생각을 합니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계와의 협력 혹은 숙청을 통해 일본 정권 창출에 성공했고,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냅니다. 

견당사는 당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200년간... 10-20년에 한번 꼴로 계속됩니다. 천태종을 가져온 최징(사이초), 밀교를 배워온 공해(구카이) 그리고 당 말기를 잘 묘사한 원인(엔닌)... 등이 유명합니다. 그리고 공해는 우동을 일본에 가져왔다는 전설적인 인물이 됩니다. 하카타에서 배가 떴고, 대부분이 승려였던 견당사는 당나라에서 십수년 유학을 한 후 하카타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하카타에는 견당 시절의 불교사찰이 남아있습니다.


3) 우동과 가라아케

우동, 라멘도 규슈가 메인이라는건 잘 아실거에요. 후쿠오카 이치란라멘 앞에 가 보면 진짜 줄이 개난리판인데... 큐슈가 면으로 개난리인 이유는 공해가 우동, 즉 면을 가져온 곳이 당연히 견당사 시점/종점인 하타카이기 때문이겠습니다. 배워온 면이지만, 일본인들은 진짜 면에 진심인거 같다는 생각이.. 한국이 국물에 진심이라면 일본은 면에 미쳐있는데 제가보기에는 글루텐 쳐서 쫀득쫀득해진 식감을 좋아하는거 아닌가.. 라고 보여서 글루텐프리 외치는 서양인들과 정반대 아닌가 싶지만.. 머 그렇습니다. 

가라아게도 큐슈가 메인. 제일 잘 튀긴 가라아케집 그랑프리가 있는데 대부분이 큐슈에 위치합니다, 가라아케에 진심인데 가라아케의 가라는 한자로 당나라의 당을 의미합니다. 중국에서 배워온 방법으로 닭을 튀긴 모양이죠. 중국 하면 당나라였으므로 당이 써 있으면 중국식이라는 얘깁니다. 당진은 당나라로 가는 항구라는 뜻입니다. 한국에도 당진이, 일본 규슈에도 당진(가라쓰)가 있습니다. 하카타에서 좀 더 서쪽입니다.


4) 무역의 시대: 송/원, 고려 시대

당나라가 망한 후 견당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송나라 원나라 때 동아시아 무역은 더욱 활성화되었습니다. 

망한 중국에서 더 배울게 없다고 생각하자, 일본에서는 국풍 문화라는 스타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본의 특색있는 문화는 이 떄부터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하타카에서 중국 강소/절강으로 가는 길 한가운데에 제주도나 완도가 있습니다. 신라 말 장보고가 여기에서 한따까리 하기도 했었구요,

수년 전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했던 신안 앞바다 도자기.. 그것도 배는 일본 하타카 배, 도자기는 송/원나라 도자기입니다. 하타카 가는 길에 한국 신안에서 침몰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것은 아닌 셈이긴 합니다. 고려시대 개성 벽란도, 하카타, 중국 북부, 중국 남부간의 무역은 이렇게 활발했습니다. 

원나라때 잠시 몽골이 고려, 송나라 군을 이용해 일본을 침략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때도 침략 목적지는 하카타였습니다. 하타카에는 당시 몽골/고려군이 침입할 때의 전투장소, 성곽 같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태풍때문에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3. 네덜란드와 나가사키

1)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1500년 포르투갈인의 인디아 도착과 함께 인도양 무역에 서양인이 개입하게 됩니다. 콜롬버스의 1490년 신대륙 발견에 큰 의미를 두는 얘기가 많지만 그거야 미국 입장에서 지네 역사니까 그런거고, 세계사적 입장에서는 유럽이 아시아와 직접 연결되었다는 점이 더 크다고 봅니다. 그 전까지는 알렉산드리아에 베네치아 배가 들어와서 후추를 받아가던 입장에서, 서양인들은 세계 무역에 직접 들어왔고, 대포와 범선으로 이를 하나하나 접수합니다.

포르투갈은 인도 서해안 고아(Goa)에 거점을 마련하고 말라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의 입구 마카오, 대만의 단슈이, 그리고 일본의 나가사키에까지 다다릅니다. 일본인에게 조총을 보여주었고 전국시대 전쟁 개빡세게 하던 일본인들은 조총을 빠른 시간 내 베껴 전국 통일에 사용하고 이후 임진왜란까지 일으킵니다.

카톨릭을 믿고, 강경한 십자군과 같았던 포르투갈 함대는 아시아에서는 이슬람세력의 저항에, 본토에서는 스페인의 위협에 몰락합니다. 포르투갈이 닦아놓았던 북아프리카-브라질-남아프리카-동아프리카-인디아-말라카-중국/일본의 루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가져갑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영국이 접수하게 되는데 영국은 나중의 일이죠...


2) 난학과 근대화의 준비

서양인과의 무역이 중요해지면서 하카타 대신 나가사키가 부상합니다. 남서방향에서 온 서양인들은 나가사키에 기항했습니다. 네덜란드인은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상륙을 허가받고 무역을 하고 학문, 특히 서양의학과 세계 정세를 전달했습니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 학문을 배우고 어학 사전을 편찬했습니다. 서양의 외과의술을 배웠습니다.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사실 난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근대 어휘는 서양의 개념을 어떻게 한자어로 번역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일본인의 고민에서 기인한 것이 많습니다. 

서양 문물의 선구지로서 나가사키는 개항 이후에도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근대화의 주요 인물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꿈을 키웠고 미쓰비시는 나가사키에서 상사로 시작해 조선업 등 중공업으로 발전했다가 군수산업 전범기업이 되었습니다. 료마는 미쓰비시 상사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1900년 이후에도 나가사키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서구 학문의 선구지역으로 이를 배우러 온 유학생들이 넘쳐나던 곳이었습니다. 손문도 망명을 왔고 서양문물을 배우러 온 중국인들로 인해 짬뽕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면과 우동의 지역 큐슈, 나가사키에서 중국 유학생들에 의해 중국식 스타일로 만들어진 중식 우동인 나가사키 짬뽕이, 화상 교역망을 통해 인천으로 들어왔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고춧가루를 태워서 빨간 짬뽕이 되었습니다.
   

4. 근대 개항과 기타큐슈

1) 페리 제독과 키타큐슈 개항

미국 페리제독의 개항은 일본 근대의 시작 상징입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털린지 10년 후 1850년대, 미국에서 태평양을 넘어온 증기선이 넘어와 에도를 위협했고 일본 막부 정부는 굴복했습니다. 이제까지 큐슈가 일본 열도의 프론트라인이었고, 외적이 침입해도 큐슈로 왔었습니다. 대양을 건너 뒷문으로 들어오니 답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요구에 간토의 요코하마 / 간사이의 고베 / 큐슈의 키타큐슈(모지코)를 새로 개항했습니다. 

키타큐슈의 모지코, 그리고 바다 맞은편의 시모노세키는 이제까지 역사에 중요하게 나오지는 않았었습니다. 조선 초까지 앞서 나왔던 하카타가 중요한 항구였고, 조선 후기 들어서 조선통신사가 시모노세키에 기항하고 세토나이카이를 통해 이어지는 바닷길로 오사카에 다다른 후 육로로 에도에 가는게 일반적인 교통편이 되는 정도였습니다만, 키타큐슈는 이제 중요한 개항장이 되었습니다.

개항 이후 일본은 혹시나 식민지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근대화에 대한 강박이 있었고, 빠르게 공업화를 진행했습니다. 나가사키에는 미쓰비시의 조선소가, 키타큐슈에는 야하타 제철소(현 신일철)가 들어섰습니다. 마침 규슈 북부에서는 석탄 광산이 개발되어 공업화를 도왔습니다. 큐슈의 철도는 이곳 모지코로부터 시작했습니다. 큐슈 북부의 동아시아 최초 공업단지들은 일본의 근대화와 군사국가화를 도왔고, 태평양전쟁 때 조선의 징용공이 붙잡혀 갔던 곳이며 미군 항공 폭격의 중심지였고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 정한론과 조슈번

키타큐슈의 모지코와 맞은편 시모노세키는 일본 근대화의 프론트라인이면서 대륙 침략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시모노세키를 한국 사람이 이름이라도 잘 아는 이유는 시모노세키 조선통신사 떄문이기도 하지만, 청일전쟁의 결과 조약이 여기에서 서명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지고 조약을 서명하러 온 청나라의 대빵 이홍장은 시모노세키에 왔다가 일본의 열혈 애국주의자 자객에게 총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고, 세계 여론은 청나라를 동정했으며, 일본 대표인 이토 히로부미는 자객 때문에 협상을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며 매국노같은 놈이라 비난했습니다. 10년 후 러일전쟁 승리 후 요동반도 끝 뤼순을 받아낸 일본은 모지코-뤼순 급행을 운영했습니다. 뤼순의 일본 기반은 결국 남만주철도와 만주국으로 이어졌습니다.

시모노세키는 지금의 야마구치현, 예전으로는 조슈 번에 속했는데 사쓰마번(가고시마)와 함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이끈 지역이면서 지금도 일본 극우의 정치적 기반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도, 작년 암살당했던 아베 신조도 야마구찌 출신입니다. 정한론을 처음 말한 요시다 소인도 야마구치 조슈 출신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소인의 제자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자가 맞다 아니다 말은 많지만 안중근 의사로부터 암살당한 후 한일합방은 이뤄졌고, 아마 당시 정황상 1인이 막고 할 문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대화 이후 사쓰마는 일본 해군을, 조슈는 일본 육군을 장악했습니다. 일본 육군 군부는 우경화해서 1930년대 이후 급발진, 정부 내각 암살, 권력 확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까지 치닫고는 망해버렸습니다. 어쩌면 백제 유민이 가장 많이 건너간 지역이고 조선과도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지만 그만큼 가까웠기에 조선과 갈등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아이러니를 가진 지역입니다. 아직도 야마구치현은 일본 우파의 지역입니다.
    

3) 쇠락한 큐슈

여튼 일본은 태평양전쟁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습니다. 미 공군은 군수공장이 들어서있던 키타큐슈에 폭격을 쏟아부었고, 근대화와 유신의 심장 나가사키에는 핵폭탄을 꽂았습니다. 나가사키에 핵 폭격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평화의 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일본의 과도한 군국주의와 실패는 다음 세대의 반성을 불러왔고 전후세대에는 좌파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평화의 공원에는 1970년대에 조총련계 인사들이 세운 조선인 희생자 기념탑과 일본 좌파의 사죄문이 있었습니다. 
    
전후 일본 경제를 상징하는 기업인 소니는 도쿄에, 도요타는 나고야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대륙과의 연계를 버리고 대신 미국으로의 수출을 택한 일본의 경제는 동쪽으로, 수도권으로, 태평양 무역으로 중심이 옮겨갔습니다. 도쿄에 4천만 인구가 살 동안 큐슈는 침체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이 부상하면서 규슈 경제가 조금 살아나나 하는 정도였지만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규슈 출신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정도만 보이네요. 한국, 중국 관광객이 내수를 살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산업적으로는 쇠락하였으나 여전히 나가사키의 조선소는 돌아가고 있고 도시의 낡은 트램은 관광객을 실어나르며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5. 스즈메의 문단속

1) 집단적 참사의 기억

최근 한국에서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가 흥행하고 있고, 저도 주말에 보고 왔습니다. 동 감독의 이전 작품인 [너의 이름은]에서 느꼈던 그 참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집단적 감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려 중국에서까지 흥행 중이라고 하네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11년 후쿠시마 쓰나미 대참사 이후 작품의 방향을 좀 바꿨습니다. 3/11이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은 모두 다 아는 트라우마의 날입니다. 대참사가 있은 지 12년이 흘렀습니다. 한국에도 여러 참사가 있기는 했지만, 2만명 이상이 사망한 이 사건과 그 규모에서 비할 재난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죠. 세월호든 이태원이든 참사를 겪었으니. 

이렇게 집단적 아픔을 이렇게 극복해가는 일본의 모습을, 집단적 기억의 치유를 영화는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 작품에서는 감히 대지진을 직접 얘기하지는 못하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이번 작품은 11년 전의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하고, 이렇게 풀어버리고, 삶의 의지와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도 제시해주려 하고 있어요.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2) 1500년을 넘게 이어온 동아시아의 교류 

스즈메의 문단속 OST에 공감이 간다는 한국인들의 평이 많습니다. 저도 영화에서 마쓰다 세이코 노래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세상에... 세이코의 [Sweet Memories]는 산토리 맥주 광고로 유명해진 노래인데 거까지 나오더라구여.. 사실 K팝의 근원도 어느정도는 J팝에 있어서... 80년대 일본 버블기의 음악과 90년대 김대중-오부치 이후 일본문화 개방에 대해 인정해야 K팝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슬램덩크 신드롬도 있고, 일본에서는 K팝 인기가 대단하고.. 서로 상대의 문화컨텐츠를 즐기는데, 앞서 설명드렸듯 동아시아의 교류는 1500년을 넘어 이어진 흐름입니다. 특히 일본과는 악연이 되었지만 같은 문화적 맥락 안에서 근대화 현대화를 이뤄냈습니다. 공감가는게 많을 겁니다.

저는 지난 3월 마지막 주 키타규슈-후쿠오카에 다녀왔어요. 한국 사람들 정말 많았습니다. 최근 일본 여행을 많이들 가지만, 가서 맛있는걸 먹고만 온다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영화를 이웃나라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봄이 어떨까 합니다. 방사능 어쩌고 하면서 조롱하기에 앞서, 어떤 역사를 살아왔는지, 그리고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를 이해하기를 원하고, 이웃나라의 참사와 그를 극복하려는 집단적 노력에 가슴 깊은 곳에서의 따뜻한 공감을 보냅니다. 여튼 우리도 참사를 겪어 봤고, 그들의 참사는 규모면에서는 수백배 큰 것이니까요.




2023년 3월 19일 일요일

광동성 얘기

광동성 얘기


1)
이번에는 중국 광동성, 주강 삼각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생각해보니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얘기는 많이 했는데 중국 얘기는 별로 안했더라구여... 의외겠지만 제가 가장 많이 다녀온 곳은 중국이고 한문도 중국어도 조금 할 수 있습니다. 광동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지리만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글 위성지도 켜 두고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겁니다. 

광동성은 중국의 가장 남쪽 해안지역에 있습니다. 광동 동쪽도 해안이 이어지는 복건성인데, 복건성은 그야말로 산이 90%인 지역이라 인구가 적고 사람들은 애초부터 바다에 나가 화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중국 내에서 영향력은 적습니다. 

주강은 광저우 시에서 북쪽으로는 북강, 서쪽으로는 서강, 동쪽으로는 동강... 으로 분리됩니다. -ㅅ-;;; 애초에 북 서 동에서 물길이 내려와서 광저우 시 근처에서 만난거죠. 서강은 길게 이어져 티벳 고원까지 가는데 반해 사실 역사적 중요도는 떨어지고, 북강 동강은 강은 짧습니다.

서강이 흐르는 광동 서쪽은 광서, 귀주인데 전통적으로 중국인, 한인이라 부르기 어려운 민족의 공간이었습니다. 역사/문화적으로는 중국이 아닙니다. 

동강을 따라가면 동관, 혜주가 나오고 여기는 역사적으로는 별볼 일 없는 곳이었지만 개혁개방 이후 IT 하드웨어 제조업이 들어선 장소가 되었습니다.

광동 북쪽으로는 호남성(후난 성)... 한나라때 지역으로는 형주 남부 되시겠고 호남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장사(창사 시)... 황충나오는 그 장사군이 맞습니다. 광동 동북으로는 강서성(장시성)이 있는데 산동네의 좁은 산길, 물길을 통해서 파양 호를 지나 장강(양자강)을 거쳐 남경, 상해로 연결됩니다. 이 얘기는 뒤에 하시죠..

2)
여튼 광동으로 돌아가보면, 광동도 완전 산지인데 주강(pearl river) 하구에만 딱 삼각주가 있습니다. 그 삼각주 한가운데에 광주(광저우) 시가 있고, 주강 삼각주의 동쪽 연안으로 동관 시(둥관), 션전 시(심천)을 거쳐 홍콩까지 내려오는 루트가 메인입니다. 수 년 전에 션전에서 광주까지 고속열차 타고 간 적이 있는데 1시간 안 걸렸던거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광저우에서 홍콩 구룡까지 고속철도가 바로 이어집니다. 

션전은 12년쯤 전에 갔을때는 이게 뭔 보따리장사 시골인가... 홍콩에서 물건 떼와서 팔고 IT 조잡한 것들 만들어서 보내는 촌구석 같았는데 코로나 직전년에 갔을 떄는 휘둥그레질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홍콩의 배후도시라는 잇점, 서양과의 교류가 가장 가까운 중국의 도시라는 잇점, 따뜻한 기후, 제도적 지원 등이 한 몫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10년 전만 해도 중국의 중심도시가 상해가 될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답은 제조업보다는 IT였는지 션전이 훨씬 더 성공했습니다. 

션젼 북쪽의 둥관 시... 에서 주강은 동쪽으로 동강... 이 됩니다. 강을 따라 동쪽으로 더 가면 혜주 시(후이저우), 하원 시(허위안)로 연결됩니다. 동관 혜주는 IT 하드웨어쪽 하신 분은 들어보셨을거에요. IT 부품들... 온갖 잡스러운 부품은 다 동관 혜주에서 만든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국 모바일폰 기업들도 여기 많이 나가있었다가.. 삼성도 그렇고.. 철수도 하고 그랬죠. 원래 별 거 없던 동네지만 광저우와 심천 사이에서 IT 제조업에 특화되어 급성장한 지역입니다. 

광주는 이와 달리 오래된 동네입니다. 당나라때부터 이슬람-말레이 상인들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알리바바의 시대, 아랍인들은 페르시아만 - 아라비아해 - 인도 서쪽/동쪽 해안 - 말라카 해협 - 타이 만을 거쳐 광저우까지 왔습니다. 온갖 황당무계한 얘기들이 천일야화에 나올 법 했습니다. 당시 세상의 모든 곳을 다니던 상인은 이슬람 상인이었습니다. 

송때부터는 중국인들도 해외로 나가면서 상인들은 말라카에서 모였고, 명청때도 해금령이 있다가 풀리다가 했는데, 마카오에는 아예 포르투갈인들이 자리깔고 앉았고, 이후 광저우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상인들이 와서 장사하고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여기에서 도자기를 사고 차를 사고 은을 결제하다가 적자가 나니까 아편을 팔고.. 결국 아편전쟁의 시발점이 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후 홍콩이 영국에 떨어졌고, 중국인은 이를 수치로 여겼지만 오히려 홍콩은 영연방제도를 받아들여 번영했고 이제는 홍콩이 자유를 위해 시위를 벌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3)
광주 서쪽으로는 서강이 흐릅니다. 광저우 서남쪽에 불산 시(포산)가 있습니다. 여기는 황비홍과 엽문의 도시, 무술의 도시입니다. 태평천국 이후에 사실상 반 독립 상태가 되었고, 태평천국군의 후예인 흑기군이 자치를 했던 중심지입니다. 흑기군은 비엣남 군과 연합해 프랑스군을 패퇴시기기도 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쳐맞고 다니는거 보면 중국 무술 자체는 의미없는거 같지만.. 

서강 남쪽으로는 강문 주해를 거쳐 마카오로 이어지는데 동쪽에 비하면 별볼일은 없고, 마카오는 도박만 남아있기는 한데 이건 포르투갈이 먼저 개척하고 먼저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의 과격한 해상 십자군과 같은 공격적인 행위는 인도 해로를 최초로 열었으되 결국 이슬람-말레이에 의해 패퇴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 자리는 상업민족 네덜란드, 그리고 그 다음 제국주의의 화신 영국이 받아갑니다. 

최근 마카오/주해와 홍콩/션전 사이에 주강대교가 뚫렸습니다. 예전에는 배 타고 다녔는데.. 

서강은 남녕.. 저 멀리 쿤밍까지 이어집니다. 중국은 수자원, 담수에 대한 욕심이 많은데 인구는 많은데 황하가 워낙 똥물이라 그렇지 싶습니다. 하필 인디아동부/동남아/중국에 흘려내려오는 물이 대부분 운귀고원, 티벳고원에서 발원합니다. 중국은 물 욕심 때문에 저기까지 영토 욕심을 낼 것입니다. 

여튼 중화문명 으로서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곳이었고, 중화문명의 땅이 아니었습니다만 이제는 점점 중요해지는 지역, 중국이 자기 본토로 생각하는 지역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몇년 전 쿤밍에 갔을 떄 초고층건물이 즐비해서 놀랐었습니다.

저는 중국이 동아시아 국가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더 중요한 국가가 될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광동 때문입니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북경 / 상해남경 / 주강삼각주 셋을 꼽겠는데 상해남경이 앞서갈 줄 알았더니 주강삼각주가 IT시대에 치고나갑니다. 

정치는 저 북쪽 끝 북경에, 군사는 더 북쪽 심양에 있으나 경제와 기술은 남쪽 끝 주강에 있으니 격차도 크고 멀리 있습니다. 이런 중국이 언제까지 하나로 갈지는 잘 모르겠는데.. 거기까지 예상하기는 좀 어렵고.. 여튼 중국에서 주강 삼각주가 중요해질 수록 남중국해를 포기할 수 없고 남중국해의 9단 도련선을 나름의 정의?로 생각할 겁니다. 동북삼성보다 귀주 광서가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덕에 동아시아, 동중국해에서 갈등이 좀 낮아지는게 우리로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4)
광저우 시 북쪽으로는 북강이 있고, 이 강은 소관(사오관)에서 내려옵니다. 소관은 광동의 관문인데 소관에서 서북쪽으로 나가면 헝양 장사 우한으로 해서 징광선이 북경까지 이어집니다. 이는 중국에서 제일 빠른 교통로입니다.

황충의 장사에서 더 북으로 가면 우한이 있는데... 여기 얘기는 다음에 하시죠 후... 전국시대 초나라부터 남북조시대 군사기지를 지나 중화민국 쌍십절 혁명에서 이번 바이러스 사태까지 할 얘기 태산인 도시입니다..

다시 소관을 가 봅시다. 소관에서 동북으로 나가면 감주(간저우)의 감강을 지나 구강 시(주장 시)의 파양호에 다다릅니다. 여기에서 장강과 합류합니다. 예전 중국을 9주로 나누던 시절, 장강에는 중류에 동정호 파양호가 바다처럼 펼쳐저 있었는데 동정호에서는 초나라 굴원이 빠져죽었고, 파양호에서는 주유가 조조의 백만대군과 싸우기 전에 수군을 훈련시켰던 곳입니다만.. 2천년의 세월 동안 퇴적되어 이제는 거진 다 메워진 상황입니다.

파양호에서 경덕진(징더젼)으로 물길이 연결되는데 여기는 중국 명나라 이후로 도자기를 만들던 공장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나온 도자기들도 사실 원나라 때 중국 경덕진산 도자기입니다.  여기에서 앞서 말씀드린 루트를 따라서... 소관을 거쳐 광저우로 도자기가 들어갑니다. 명나라때는 백자를 팔았지만 청나라때는 광저우에서 서양인들 취향에 맞게 색깔도 넣고, 알파벳도 쓰고, 귀족가문 문양도 넣고, 성경 구절도 넣고... 고객 커스터마이징을 하고 유약을 한번 더 발라 구운 후 출하됐습니다. 원래 무역으로 한따까리 하던 동넵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컨테이너가 가장 많이 출입하는 곳도 바로 여기, 션전항입니다.

2022년 8월 7일 일요일

안산시 탐방

 <8/7 안산시 탐방: 외국인 집합소, 교통 개선 확연>


이번 주말에는 안산시에 다녀왔습니다. 외국인들의 성지? 집합소?가 되어가는 중요한 지역이라 눈으로 보고 싶었거든요. 게다가 거제도는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파업 사태로 말이 많은데, 같은 용접일 할거면 안산에 가서 하는게 훨씬 낫다는 얘기도 돌더라구요. 역시 경남의 제조업은 지고 경기 서남으로 넘어옵니다. 그런거 좀 보고 싶기도 했구요.


일단 4호선을 타고 직접 갈 엄두가 안나서.. 용산에 수원까지 무궁화호를 타고 30분 걸려서 수원역에 갔고, 수원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20분만에 안산에 도착했습니다. 수인선 이게 참... 일제 중기에 깔아둔 노선인데.. 90년에 폐선되었다가 이제 다시 꺼내서 전철 연결해서 쓰고 있습니다. 저 북쪽에 고양-의정부까지 교외선도 죽어있는데 이거 언젠가 살릴 수도 있을거 같고.. 수도권 폐선은 언제나 관뚜껑 열고 나올 수 있겠다 싶어요. 


여튼 수인선은 인천-연수-시흥정왕-안산공단-안산중앙-수원을 연결하면서 경기 동부 분당선과 연결됩니다. 경기 남서를 횡으로 잇는 새로운 축이 생겼습니다. 사람들도 꽤 많이 타더라구요. 같은 수인분당선이지만 수원역 서쪽부터는 외국 스멜, 수원역 동쪽부터는 삼성전자 스멜.. 이렇게 확 바뀝니다.


수인선은 확실히 부활한게, KTX마저 수인선으로 연결될 예정입니다. 평택에서 올라오는 KTX 노선이, 수원 서쪽 어천역 근방에서 좌회전해서 수인선으로 갈아타서, 안산 초지에 한번 서고, 인천으로 갑니다. 인천에서 어디에 설지는 모르겠는데 연수와 인천 구시가의 사이인 송도역(송도신도시 아닙니다)에 선다고 하는데 아직 확정은 아닌거 같고.. 여튼 그렇습니다. 


KTX는 서해선으로도 연결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전철로 안산-시흥-부천-김포공항-고양대곡을 잇는 전철이 생겼는데요, 이 노선을 남쪽을 더 뚫어서 기존의 장항선에 연결하는 KTX 노선, 인천-안산-평택항-충남당진-충남홍성-충남대천-전북군산으로 이어지는 서쪽 라인이 구상중입니다. 이 한가운데에 안산이 있습니다. 



안산시는 외국인이 많기로 유명합니다만, 외국인 거주지와 한국인 거주지는 꽤 분리되어 있습니다. 도시 동쪽은 초지역, 중앙역, 한대앞역.. 이쪽은 애초에 안산시가 계획도시로서 생겨났을 때 아파트 때려박은대라서.. 90년대 00년대 준공 아파트가 많고 한국사람들 위주로 살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많은 것은 안산시에서도 서쪽인 안산역 근처구요. 이게 안산역 부근부터 철도 남쪽으로 해안가로 공단이 쫙 펼처지는데.. 거기서 누가 일하겠습니까... 외국인들이 들어올 수 밖에 없는 그런 구조가 되시겠습니다. 


안산역 북쪽 다문화시장은 정말 한국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구요, 그렇다고 대림처럼 중국 느낌이 나지도 않습니다. 외국인들은 원하는 물품을 얻기 힘들기도 하고 원래 전통시장이 친근하기도 하고.. 전통시장의 각국 특화 상점을 이용한다고 하던데요, 뭐 이마트 가봐야 원하는 물건 없을거니까 자연히 그렇게 되겠구나 싶습니다.


거주 외국인 수는 10만명, 안산시 인구가 100만명이니까 10%인데..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은 됩니다. 그래도 열의 하나.. 그 이상은 되겠습니다. 일단 파악되는 외국인 중에는 중국계 동포 및 중국인이 50%를 넘구요, 우즈벡, 러시아, 카자흐, 키르기즈 등 CIS 출신이 25% 정도, 비엣남이 3%(비엣남은 동남아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순으로 있는 동남아시아가 5%,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 랑카(스리 랑카의 랑카는 섬이라는 뜻이고 스리는 접두사입니다), 파키스탄, 인디아 순인 남아시아가 2% 내외 되시겠습니다. 근데 머.. 미등록 인구가 한 2배 되지 않겠습니까. 대충 중국인/연변인 절반에 나머지 절반은 우즈벡/고려인, 그 나머지는 동남아/비엣남/남아시아 이렇게 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역시 중국계가 많지만, 그래도 대림동과 좀 다른 점은 고려인의 비중이 많고, 꽤 diversified 되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인지 안산역 앞 다문화거리의 느낌은 중국이라거나 대림동과는 다른, 말레이의 콸라룸푸르나, 싱가폴의 리틀인디아/게일랑 처럼 느껴졌습니다. 중국인이 꼭 주류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오는 방법은 산업연수생 같은 제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렵습니다만, 한국계 동포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방법은 상당히 쉽습니다. F4 비자라는 시스템을 이용하는데요, 사실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한국 비자 연장은 아주 곤란한 일입니다. 예전 저희 집에 살았던 외국인 유학생 친구들도 참.. 목동에 가서 (오목교에 가면 외국인 등록소인가 뭐시기 있습니다) 비자 연장 받아야 하는데 괜히 밉보이면 연장 안되고 그럼 변호사인 와잎이 도와주기도 하고 뭐 개난리를 치고 그랬었는데 한국 혈통이 있다고 믿어지는(적당한 근거자료만 있으면 됩니다, 중국정부의 조선족 인증이라거나) 동포의 경우는 거의 무제한으로 비자가 연장이 됩니다... F4 비자라는게 그런거구요. 3년에 한번 갱신하면 무제한으로 거주 가능합니다. 사고만 안치면. 자격요건은 대학 이상 졸업자거나 무슨 기능... 뭐 이런거 있는데 아주 단순한 자격증.. 네일아트나 미용이나 맛사지나 머 이런거 있으면 ㅇㅋ가 되기 때문에.. F4 비자가 거의 100만명에 육박하는데.. 그 중 90%가 중국인입니다. 나머지는 미국/캐나다인데, 그건 재미교포, 재 캐나다 교포 같은 검머외이기 때문에 외국인이라 하기 어렵고.. 사실상 F4는 소수의 고려인을 제외하면 한국계 중국인에게 열려있는 제도죠. 한국 외국인 제도라는게 이렇습니다. 다른 국적에는 문을 강력하게 닫는데, 한국계 혈통이 조금 있으면 평생 열어줘요. 


대림동만 해도 중국인 비중이 너무 높고, 이렇게 단일 국적 외국인을 받는게 맞나, 미국도 비슷한 관점에서 히스패닉 받다가 국가정체성 거덜나게 생겼는데, 안산 다문화거리는 중국인만이 아닌, 고려/CIS인, 비엣남인, 동남아인, 남아시아인 등 많은 문화가 한국에 공존할 수 있겠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서도 중국이 50%가 넘습니다만..



여튼 안산역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시흥 정왕, 오이도를 거쳐 배곶신도시에 도착하고, 여기서부터는 다시 한국인들의 아파트 마을이 됩니다. 서쪽으로더 넘어가면 인천 남동, 연수를 지나 구 인천에 다다릅니다. 안산역 남쪽으로는 반월공단을 넘어, 시화대교를 지나 시화호 남쪽으로 가면 이제는 송산 신도시가 열심히 건설 중에 있는데요.. 여기는 또 어떻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다문화 마을.. 여기의 미래도 궁금해지구요.


안산에서 서울에 돌아오는 길은 참 고됐습니다. 4호선 타고 1시간 10분을 느릿느릿... 산본-금정-평촌-과천을 지나야 간신히 사당에 도착하는데요... 지금은 1시간 넘게 걸리지만 2년 후부터는 얘기가 또 다릅니다. 신안산선이 개통되거든요. 여의도역 공사하는거는 다들 보셨겠지만 여의도-영등포-신풍-구로디단-광명역-에서 바로 안산중앙으로 꽂아버립니다. 안산중앙에서 구로디단까지 18분, 여의도까지 25분 걸립니다. 와 이럼 다닐만 하죠. 동서남북으로 전철이 다 뚫리는 와중에 서울 급행이 뚫힌다? 거기에 GTX C 노선이 안산에 분기를 주네마네 하는데 뭐 얘기나왔으니 주겠죠.. 이러면 살만 합니다. 이러니까 중앙역 센트럴 푸르지오가 9.5억, 초지역 메트로단지 푸르지오가 9억 하고 계시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경기 서쪽이 점점 더 좋아지는데(그렇다고 똘똘한 한채 시대에 뭘 사겠다는건 아닙니다만) 서쪽의 트래픽이 1차로 영등포에서, 그리고 여의도로 집결하는 느낌입니다. 신안산선은 영등포에서 쉬고 GTX B는 신도림, 여의도로 들어오네요.

2022년 5월 22일 일요일

울산-기장-부산 여행

<5/22 울산-기장-부산 여행>

이번 주에는 집구석에 있었습니다. 1km 이내에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윤 대통령의 회담이 있었군요.. 음 뭔가 뽕이 차오르기도 하고.. 동네 시끄라워질까봐 걱정도 되고 그랬던 주말이었습니다.

울산-기장-부산 여행은 사실 지난 주에 다녀왔어요. 너무 더워지면 힘드니까... 이럴 때 다니는게 낫습니다.


1. 다녀온 이유, 광역도시철도

다녀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1) 울산-기장-부산까지 동해남부선 전철이 지난 해 연말 개통됐는데 그걸 타 보고 싶기도 했고, 2)기장에 오시리아라는 새로운 레져타운이 생기고 있는데 그거 보고 싶기도 했구요

여정은, 울산까지는 KTX, 울산에서 부산까지는 동해남부선 전철, 부산에서 서울 오는건 비행기로 왔습니다. 울산KTX는 열차로 정확히 2시간 소요되구요, 부산에서 비행기로 오는건 대기시간에 집에 오는 시간까지 해서 2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고속철도/비행기에는 4시간 룰이라는게 있습니다. 이보다 가까우면 시간상으로 철도가 유리한 편이고 멀면 비행기가 유리하다는 얘기죠. 가난한 인민이 많은 중국이야 아무리 멀어도 철도 때려박고, 고속철도 없는 미국은 자동차로 가기 어려우면 걍 비행기를 타지만.. 대충 교통망이 둘 다 깔려있다고 하면 4시간 넘어가면 비행기를 많이 탄다는... 머 그런 얘깁니다.

서울-부산은 KTX로 3시간 정도면 해결되니까 애매합니다. 울산까지는 KTX로 가겠는데 부산에서 오려니까 걍 비행기ㄱㄱ.. 이렇게 되는 딱 그 정도 거리가 부산인거 같구여. 걍 30분 땡겨서 비행기를 타고 마는... 그래서 한일 해저터널 경제성이 의심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뚫는다 해도 요즘 세상에 누가 도쿄를 KTX-신깐센 타고 6시간 걸려 가겠습니까.. 부산-후쿠오카나 열차 타고 다니고 말 겁니다.


동해남부선은 원래 철도로 이어져있던 곳인데, 이번에 동해안을 돌아 울산까지 개통되었습니다. 지금은 부산 시내(서면)에서 동해안으로 해운대-기장을 거쳐 울산까지 연결되지만, 앞으로는 울산에서 북으로 경주까지 연결되어, 서쪽으로는 경주-동대구, 북쪽으로는 경주-포항까지 전철을 연결할 계획입니다. 으마으마하네요 전철타고 붇싼에서 울산경주찍고 대구까지ㄷㄷ 이와 별개로 울산에서 양산-서부산-김해까지 이어서 동남부를 원형으로 돌리는 광역철도도 계획하고 있는데 이런 거창한 계획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광역철도는 전국에 한군데 더 생길 예정입니다. 청주-세종-대전. 광역도시권에 계획중인데, 청주-오송-세종-대전(유성)-대전(구도심)-대덕(신탄진)-청주로 이 동네를 한바퀴 뺑 돌릴 예정이죠. 여기는 행정수도권에 수요도 많으니 될 것 같습니다.



2. 울산: 태화강, 역사, 산업단지

울산에서는 일단 태화강에 놀랐습니다. 제가 알기로.. 태화강이 전국 탑티어 똥물이라고 하는데, 사실 똥물이 차라리 낫지 저는 페놀 수용액(solution)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 깔끔해져서 깜짝 놀랐어요.

태화강 국가정원, 대나무숲 10리길은 한번쯤 다녀와 보실 만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깨끗해졌는가... 하니... 광역시로 분리된 이후 예산편성에 자율성이 높아져서 환경복구에 돈을 많이 때려박았다.. 라고 합디다. 애초에 돈이 많은 동네인데 정부에서 뜯어가기만 했으니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울산은 단구대 벽화 유적 있었다는걸로 열심히 고래를 마케팅용으로 팔아먹고는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경주와 연관이 많습니다. 신라시대 수도인 경주의 외항이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나름 아랍, 인도 상인들도 신라에 드나들었단 기록이 있죠? 당시 항구는 울산항이었을겁니다.

지질학적으로 경주-울산은 형산강지구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형산강 지구대가 머냐... 하면.... 일단 여기가 산에 둘러쌓인 평평한 좁은 면 같은 동네인데, 마그마가 용출되는 계곡(valley) 정도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냥 머 산이 양쪽으로 뜯겨나가면서 골짜기가 생기고 거기에 마그마가 자리잡아서 얇은 선과 같이 평평한 지역이 생겼다 정도 보시면 댑니다... 이 동네 다음 지도를 켜 놓고 잘 보고 계시면 아 이게 이런 소리였구나... 하시긴 하실 겁니다.

여튼 그래서 경상도 동남부가 전부 다 산자락인데, 경주에서 울산 가는 길은 평지로 길이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경주에서 울산 가는 그 길목에는 불국사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게 다 신라의 메인 스트리트, 경부고속도로였다 보시면 될 겁니다. 동남쪽 구석탱이에 숨어있는 경주는 울산항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었습니다. 경주에서 북쪽으로는 포항까지 평지가 쬐끔 있져.. 포항도 북쪽으로 나가는 관문이었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 신라는 강원도 동쪽 해안가(관동지방)에 세력을 뻗쳤습니다. 지금도 강원도 관서와 관동은 완전히 다르져... 관동에는 신라의 불교 문화와 유적(양양 낙산사 등)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북쪽 양양부터 남쪽 울산까지 쭉 길게, 동해안은 같은 신라 문화를 공유했더랬습니다.

경주의 위상은 고려 몽골 침입기 정도까지 유지됐습니다. 고려 초기 3경에 경주가 들어갔고, 경상도(경주, 상주) 라는 명칭이 생긴 것도 고려 초기였습니다. 그때야 머 이전 국가였던 신라 수도였으니까.. 경주가 쇠퇴한건 몽골 침입(1200년대)때 거하게 다 태워먹고,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낙동강을 중요한 교통로로 쓰면서 경주는 머 콩라인이 되어버렸댔습니다.. 울산에서는 말이나 키우고 고래나 좀 잡고.. 임진왜란 때 잠시 나타나는데 일본애들이 밀리면서도 여기는 안 내주려고 왜성도 쌓고 하면서 저항했는데 머 불가능한 야심이었죠.


잊혀졌던 울산은 일제시대 들어와서 다시 주목받는데, 당시 내지인 일본과의 접근성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1930년대에 울산을 이미 중화학공업 단지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설계도랑 다 뽑아놓고... 공사 요이 땅 하려는데 태평양전쟁 터지면서 무산됐습니다만 울산의 공업단지 계획은 한국에서 그대로 이어져 1950년대 삼양사의 설탕공장이 울산 공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삼양사야 지금 와서 보면 전라도 대표기업이 되어버렸고 JB지주 최대주주로 계시는데.. 시작이 울산 제당공장이라니 아이러니합니다.. 비슷한 때에 삼성 제일제당은 부산 제당공장을 지었는데, 한국 공업화의 시작은 수입품의 국산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튼 지금은 자동차 금속 조선 석유화학이 몰려있는 한국의 대표 산업단지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발간한 자료에서 원화가치와 제조업 역량과 글로벌 시장 접근성 셋이 잇다면 이 나라는 혁신이 잘 되지는 않더라도 위기는 면하고 산다, 라고 썼는데 여튼 캐파와 낮은 고정비 단가로 벌어먹고 사는 울산 되시겠습니다.


3. 부산의 지리와 역사: 동래, 부산, 해운대

부산으로 넘어가봅시다. 부산은 사실 북쪽 내륙지방인 동래현과 남쪽 항구 지방인 부산포가 합해진 도시입니다. 원래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은 동래현에 살았습니다. 지금도 동래구에는 동래읍성과 동래부 관아가 남아있고, 지금도 온천천 따라서 많은 부산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부산역 근처인 부산포, 초량동 머 이런데는 사실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 개발한 항구입니다.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항은 개항되었고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항구를 접수했습니다. 경부선 철도를 여기까기 깔았습니다. 부산항은 일본에 들어가는 입구이자 조선의 출구가 되었고 항구 맞은편 영도에는 조선소가 들어섰습니다.

부산이 원래 태백산맥의 마지막 끝이 바다에서 만나는 곳이라 산이 높고 터가 좁아서 사람 살기 어려운 곳인데, 그 어려운 곳에 사람들이 들어앉아 살았습니다. 625 전쟁때에는 그 많은 피난민들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살았습니다. 자갈치시장에서 수산물 팔고, 국제시장에서 밀수품 팔고, 영도 깡깡이마을에서 배 녹슨거 떼어가며(깡깡이질)하고 동네방네 제첩국 팔면서 부산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동래와 부산이 만나는 지역인 진구(부산진구라고 하면 외지인임)의 서면이 도심으로 부상했습니다. 사실 하천(동천)을 복개한 거리입니다. 현지인들은 서면이라고 안하고 쓰면이라고 하는거 같습디다만... 국밥먹으려면 쓰면 가면 되구여..

90년대 이후에는 해운대가 택지로 개발되어 중동 신도시에 마리나에... 머 서울사람 울고 갈 부동산 견적 나오니까는 거기 가서는 한번 놀라고 오심 될 것 같습니다.


4. 부산의 변화: 산업은 서쪽으로, 레져는 동쪽으로

평지가 거의 없으니 부동산 개발이 빈부격차를 키우는 요인이 되는거 같구요. 한국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큰 지역이 부산이 아닐까 합니다. 해운대는 홍콩, 싱가폴 같은 느낌이 나는데, 사하 영도 중구는 머.. 답답합니다.
       
땅이 좁으니 부동산 개발이 중요해집니다. 산업은 서쪽으로, 레져/부동산 개발은 동쪽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서쪽에는 부산신항만이 생기고 녹산단지 등 중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김해, 창원, 거제 산업단지와도 연계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배후도시인 김해 장유에는 젊은 층의 유입이 많고 경상도 내 민주당의 거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동쪽은 리조트 지역으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해운대야 뭐 엘시티로 개발의 정점을 찍었습니다만 최근에는 송정, 오시리아쪽이 개발 중입니다. 바다에서 놀기는 역시 동해안.. 인거 같은데 동해안의 남쪽 끝을 버려두기는 아깝죠. 부산의 개깡촌이었던 기장군은 오시리아라는 이름으로(부산은 지역명 이상하게 짓기로 유명합니다. 괘법르네시떼라던지..) 개발 중인데, 롯데아울렛에 롯데월드에 힐튼호텔 아난티 뭐 별거별거 다 들어오는 중이고 이제는 주변 2대도시 부산 울산에서 전철이 뚫렸습니다. 전철 타고 잼민이들 엄청 놀러옵니다.

서쪽은 산업, 동쪽은 레져면 가운데 부분은 어떨지... 재개발하거나 낙후되거나.. 둘 중 하나인거 같구요. 서면 전포동 까페거리는 잘 돼서 난리, 일부 살만한 곳은 재개발재건축, 남쪽으로 갈 수록 답 안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5. 도시국가가 되어가는 한국

한국은 여튼 도시국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5천만 인구중 서울/경기에 50%가 살아요. 지난번에 평택/안산/시흥에 동남권 산업단지가 다 옮겨오고 있다 말씀드렸는데 역시 동남권의 쇠퇴는 막을 수 없지 싶습니다. 산업은 빠져나가고 관광은 늘어납니다. 송정, 기장은 1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강릉, 속초와 닮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수도권 외에 남는 지역이 있다면 아마 앞서 언급한 동남권 지역, 청주/세종/대전 이들 2개 광역지역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역 문화가 잘 살아남아 줬으면 합니다. 한맺힌 전라도와는 달리 붓싼에는 서울에 지지 않는다는 유쾌함과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죽어라 야구하는 해태 타이거즈와는 달리, 롯데는 못하면 욕먹고, 마 치와뿌려라, 하고.. 그러다가도 내일 다시 응원하고 그렇습니다ㅎㅎㅎ

2022년 5월 2일 월요일

경기남부 탐방

<경기남부 탐방>


저는 어제 경기남부/충남북부 1호선 구역, 오산-평택-천안 라인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주요 거주지역과 상업지역을 보고 왔어요.
사실 여기가 디게 중요한 지역입니다 지정학이든 산업이든 여러모로... 어제 한 3만 보 걸은거 같네여

1호선을 따라 북에서부터 남으로
송탄 (미군 공군기지)
평택고덕 (삼성반도체, 고덕신도시)
평택지제/구 평택
평택 험프리스 미군부대가 있고
그 남쪽에 천안/천안불당(삼성SDI)/탕정(삼성디스플레이) 가 있습니다.


1) 오산-평택-천안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이면 미군 공군기지와 육군기지가 여기 있겠습니까.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는 서방세계의 대 중국 최전방이자, 최대규모 기지입니다. 대만에 있던 미군은 1980년대 미중수교와 함께 철수했죠.

평택/오산에 미군이 많은 것 같지만, 개항기부터 인천과 함께 청나라 산동상인이 많이 들어와 송탄땡땡 등 이름난 짬뽕집도 많고, 지금도 평택항으로 중국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구시가지에는 중국어도 많이 들립니다. 간판에는 영어/중국어/한국어 셋 다 써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애초에 중국과의 접근성과, 한반도 내의 위치 때문에 고대부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과거 신라시대 이 근처에는 당항성이 있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락하던 전진기지였습니다. 백제는 의자왕때 당항성 점령 직전까지 갔는데 당나라의 경고를 받고 철수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한강-새재-낙동강의 하운 교통로가 더 중요해진터라, 임진왜란 때 새재를 넘어서 충주 탄금대에서 막느냐 못막느냐가 중요한 싸움이 되었습니다만, 정유재란때 직산 전투(천안)에서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왜군을 막은 적이 있고,

청일전쟁때 청군이 여기에 상륙했고 일본 청군의 중요 전투인 성환 전투도 천안에서 벌어졌습니다. 6.25때 미군이 첫번째 저항을 시도했던 곳도 오산입니다.

서쪽은 아산만 바다가 깊이 들어와있고, 동쪽은 안성쪽 산지가 시작되니까,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목줄과 같은 곳이 됩니다. 모든 남북 교통로가 산을 타거나 바다를 건너기 싫으면 여기를 지나가야 합니다. 이 곳에는 52년부터 미군 공군이 주둔했고, 지금은 미군 육군까지 여기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한국 해군기지도 있습니다. 수도권의 목줄인 동시에 중국본토와는 500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2) 평택 고덕/천안 불당 퐁퐁

요즘 신도시들은 단지 진짜 잘 지어놓더라구요. 단지와 단지 사이에 길쭉하게 (차가 안다니는) 공원을 꼭 둡니다. 그 사이에 학교도 끼워넣고.. 발코니도 공원쪽으로 다 냈더라구요. 평택고덕/지제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이 지어지고 있고, SRT 정차에 KTX도 설 것 같고.. 인구 한 3-40만까지는 계획하는거 같더군요. 천안아산역 바로 근처의 천안 불당은 수도권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도시계획은 아주 잘 되어 있고, 일자리는 주변 삼성탕정과 천안 디스플레이/SDI가 있어서 살 만 해 보였습니다.

서울에서도 한강의 메리트를 계속 얘기하지만, 한강보다는 사실 삶에 더 만족을 주는 것은 공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서울에야 뭐 녹지가 잘 없으니 한강둔치를 끼고 있는 강을 얘기하기도 하겠지만...

요새 인터넷에서는 '퐁퐁남' 밈이 핫하져... 돈 벌어와바야 와이프한테 다 털리는 불쌍한 남편 컨셉.. 머 저는 그게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20세기의 가족구조를 가지고 21세기의 사고방식으로 살려니까 다 힘든거 아닌가.. 21세기에 결혼 전에 누구를 좀 만나면 어떻습니까. 예전처럼 애 대충 적당히 키울 수도 없고 교육은 그래도 21세기에 맞게 시켜야겠지... 여성의 사고방식은 21세기 수준이라 독박집안일은 싫지.. 여튼 다들 사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퐁퐁이 주요 거주지역이 동탄, 평택, 천안 머 이런 곳인데 근처에 삼성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나 머 그 비슷한 주요 IT HW기업들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산업단지 근처에서는 여전히 20C의 가족구조가 유지됩니다.


3) 중요해지는 경기서남부

여튼 한국의 헤비 인더스트리는 인천부터 안산시흥 화성평택을 거쳐 아산당진까지, 시화호 아산만을 중심으로 재정착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수도권의 인력풀과 인프라를 이용할 수도 있겠구요. 그 만큼 부울경은 메리트가 없어지겠습니다.

교통인프라도 경부축을 잇는 식으로 00년대까지는 진행되었는데, 이제는 경기서남부 산업지역도 지원이 꽤 있을 걸로 생각이 됩니다. 철도든 고속도로든... 이쪽으로 많이 갑니다. KTX인천에 신안산선에 여러 고속도로들.. 이 지역에 외노자 유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한국 저학력 남성의 위치도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튼 이 동네는 계속 중요해질 겁니다. 한국에서 서울/판교와 같은 첨단산업만 하는건 아니고, 경상남도는 수도권에서 너무 머니까요.

2022년 3월 6일 일요일

예측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하여

<예측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하여>


주말에는 예측 방법에 관한 책을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예측이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저도 틀렸지만 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전문가가 러시아를 감청하고 있던 미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전격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우크라이나 침공 예측
사실 저는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작년부터 상황이 심상찮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 그 지역과 역사와 문화와 지정학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월에 제가 내린 판단은 1)이제 와서 푸틴이 진격하는것은 큰 손해, 2)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역사적 감정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미련을 버리기 어려운 곳 => 그래서 결론은 돈바스 정도까지만 합병하고, 나머지는 욕심나지만 '다음 번'의 숙제로 미룰 것, 이라고 예상했고, 높은 확률을 부여했습니다. 어쩌면 72세의 푸틴에게 '다음 번' 이라는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간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 세대'를 고민하는 중국은 무섭죠..

- 테틀록
예측에 대한 여러 책을 읽다가, 저는 테틀록이라는 사람이 여러 문헌에 자주 등장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테틀록은 와튼 스쿨 교수인데 예측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그의 책 [슈퍼 예측]은 이쪽 관련해서 읽은 책 중 제일 괜찮지 싶습니다. 책의 공동 저자인 댄 가드너도 와튼 스쿨 교수인데, 제자이거나 후배인 것 같더군요. 그도 [앨빈 토플러와 작별하라] 라는 비슷한 책을 지었습니다.

- 테틀록의 예측법
테틀록은 세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지만, 예측 가능성이 있는 문제는 예측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커뮤니티를 운영해가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전문가를 '고슴도치형'과 '여우형' 으로 구분하는데, 고슴도치형은 이론과 모델이 완벽하고, 자신의 이론과 모델을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려는 전문가로서, 학문적인 의미는 있으나 실제 세상일을 예측하는 역량은 떨어진다고 진단합니다.

반면 여우형은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잠자리의 눈'과 같이 세상 모든 일에 눈을 부릅뜨고 뉴스를 수집하며, '페르마' 처럼 문제를 분해하고 경중을 따져 수치화하고 업데이트하여 확률을 조금씩 좁혀나가는 그런 스타일의 예측가를 말하고, 이런 방법은 분명 어느 정도까지는 워킹하는 것 같습니다.

- 베이즈 프로세스
기준율(base rate)를 일단 머리 속에 넣어두고, 뉴스와 확률을 업데이트 해 가면서 예측하는 것이 인간의 사고 판단 방식인데, 이것을 베이즈 프로세스라고도 부릅니다. 계속 정보를 업데이트 해 가는게 통계학자 베이즈(Bayes)가 제시한 확률론적 방법이라서요. 여기에서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1) 기준율(base rate)를 잘 세우는 것: 애초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아닐지, 사고를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를 결정하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시장의 폭락 가능성은, 실제로 나타난다면 매우 우려스럽지만 자주 일어나지는 않기에 base rate는 낮게 시작해야 맞겠습니다.

2) 대표성과 보수주의의 문제: 그럴듯한 스토리는 가능성은 낮으나 사람들은 높은 확률을 부여하는 반면(대표성), 확률 가중치는 높게 주어야 하지만 이전에 대비해서 큰 변화가 없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측에 별로 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 월 고용지표에 관심을 많이 가지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까지 대단치는 않은 반면, 연준의 시장 판단이 조금 변한다면, 그 폭이 크지는 않더라도 이건 의미있게 반영해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거죠.

3) 나비효과: 올해 나비효과... 라는걸 정말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뭐가 조금 바뀌면 이게 미래를 다 바꿔버리는 것 같고.. 쉽게 예측할 수 있다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애초에 예측이란게 작동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으로요. 여기에다가 미국이든 한국이든 개인투자자들이 더 많아져서 그런지 복잡계 물리학적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는게 더 워킹하는거 같은데, 뭐가 조금 문제가 생기면 각 구성원들에 피드백이 먹히면서 뉴스가 증폭되고 반응은 과잉되고.. 바로바로 추세반전을 얘기하는것도 금물이다.. 그런 판단이 듭니다.

4) 휴리스틱과 신중한 판단: 인간에게는 침착하게 천천히 추론하는 사고방식과, 대충 후딱 결론내리는(휴리스틱의) 사고체계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고 하죠. 휴리스틱이 빠른 판단에는 도움이 되지만 정교한 판단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트레이딩에는 도움되겠지만, 지금 내가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미래를 예측할 때는 사고체계를 재점검해야 하겠습니다.

- 예측에 대한 노력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고, 예측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예측을 통해 그 범위를 좁혀나갈 수 있고, 확신의 정도에 따라 확률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노력한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예측하고, 피드백하고, 확률을 높여가 보겠습니다. 책에 대한 얘기도, 예측에 대한 얘기도 할 말이 더 많지만.. 글이 늘어지니 여기서 줄여야 할 것 같네요. 궁금하신 분은 제가 책을 더 추천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1월 16일 일요일

영어의 근원을 찾아

 <영어의 근원을 찾아>


토요일에는 [영어의 힘]을 읽었습니다. 한국어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것은 우리말 어떤 것은 한자어로부터(일부는 오랜 중국어로부터, 일부는 근대적 개념을 한자화한 일본어)로부터 왔다는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영어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영어도 라틴/그리스/프랑스의 뭔가 문화 발달한 동네에서 건너온 로망스계 어원과 순우리말 같은 색슨 노르만의 게르만계어원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찾아가면, 동아시아의 문자문명을 거슬러 올라가면 갑골문이 있는것 처럼, 인도-유럽에는 로망스계와 게르만게의 저 위에 산 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유러피언 어원이 있습니다.

영어에서 왜 유사동의어(almost synonym)을 중시하는가? 이는 게르만-노르만 기반 단어와 프랑스-로만 기반 단어가 공존하면서 다른 의미로 분화되었고, 이 덕에 미묘한 개념의 차이를 적확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guarantee, warranty의 비슷한 두 단어가 있고, 둘 다 쓰이는 이유는, 앞의 것은 나중에 들어온 프랑스어 기반, 뒤의 것은 원래 있던 게르만어 기반인데,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살려 영어에 둘 다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두 단어 모두 산 스크리트어원인 *wer (to cover)에 그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문법의 변화도 재미있습니다. 영어는 원래 라틴어와 같이 어미 변화로 성 수 시제 격을 나타내는 언어였지만, 라틴어적 경험이 없는 데인로 인들은 어미변화가 어렵고 개빡쳐서 전치사를 만들고 어순에 의미를 부여해서 앵글로인들에 전파... 라틴어의 격변화가 얼마나 개빡치는가. 지금의 독일어도 대단히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에 비하면 영어의 전치사는 혁명이었습니다. 전치사를 던지고 새로운 단어를 추가해서, 라틴어처럼 머리를 굴리지 않고도 영어 문장은 계속 설명을 늘려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재미로 하고 있지만, 혹시 본인의 어휘를 고급지게 레벨업 하고 싶으시다면 도전해보실 만 합니다. 저는 영어로 말은 잘 못하고 읽는것도 꽤 느린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Word power made easy] 떼는데 반년 정도 걸렸습니다. 

흑사병과 인플레이션

 <흑사병과 인플레이션>


여러 역사책들을 뒤적뒤적 해 보면서... 사실 흑사병과 그 이후의 인플레이션, 농민 반란을 생각해보면 이번의 공급발 인플레이션을 아예 예측 못할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의 사례를 찾아보면 도시는 사람들이 텅텅 비었고, 농민들은 일하기를 거부하고 신분 상승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곡물가격은 흑사병 발병 이전부터 올라 있었는데 인구가 증가한 반면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근이 흑사병의 확산에 일조했습니다.

1300-1350의 인플레이션은 흑사병으로부터의 공급 차질 때문이었고, 1550의 인플레이션은 신대륙 은의 유입으로 인한 화폐적 현상이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의 CPI상승은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급망 차질과 과도한 재정정책으로 인한 수요가 만나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자산가격 폭등은 1550년과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1800년 경의 인플레이션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때문에, 1910년대의 인플레이션은 1차대전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1960년대의 인플레이션은 인위적인 통화, 재정적 지출이 타이트한 고용시장과 맞물리면서 근로자들의 기대인플레이션을 자극했습니다. 달러가 금본위제를 포기하기도 했구요.

흑사병 이후 인플레이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수요도 감소했고, 살아남은 농노들의 지위는 개선되었으며,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면서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흑사병이 초래한 사회적 변동은, 귀족의 약화와 도시민의 성장을 불러와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1600년대에는 가격은 계속 상승했으나 아직 인플레이션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임금은 그렇게 빨리 상승하지 못했고, 이는 지방 대지주의 토지가치 상승과 도시 장인이 만드는 상공업제품 가격 상승을 불러왔습니다. 1600년대의 물가상승은, 당시의 '양적완화' 였던 신대륙발 은 수송용 갤리온 함대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게 된 1600년대 후반에 가서야 정상화됩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요, 여튼 역사는 사람들이 다시 일터에 돌아가고, 양적완화가 중단된다면 물가가 안정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연경, 북경, 베이징>

 <연경, 북경, 베이징> 1. 북경 현황 - 맑은 공기, 남아도는 젊은 인력, 외국인 관광객 없음 지난 주말 금토일 잠시 중국 북경에 다녀왔습니다. 남중국은 가끔이지만 북경은 25년만이었어요. 북경을 자주 다녀온게 아니기 때문에 hi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