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이창호의 승부>
조훈현, 이창호의 사제간 바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승부>를 보았습니다. 참 좋더라구요. 어쩌면 영화가 좋다기보다는 재료가 좋았었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일이 많았던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 정도 소재는 흔치 않습니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재료라는데 영화도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재료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잘 풀어내 주었습니다. 조금 아쉬운 듯 하니 욕심이 날 법도 하지만 양념하지 않고 담백한 한 끼를 내놓았습니다. 이정도면 감독에게 고맙습니다.
영화라는 장르를 사랑합니다. 요즘은 미디어 산업이 드라마로 많이 넘어가는데 드라마는 서사가 늘어지는 감이 있어 선호하지 않습니다. 수십부작을 어떻게 다 보겠으며 시간을 쏟아부을만큼 여유롭지도 않습니다. 보겠다고 점찍어둔 NHK 사극 리스트는 은퇴하고 나서야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영화는 2-3시간이라는 짧은 순간에 간접 경험을 쥐어짜내는 느낌입니다. 관점은 다양하고 감각은 새롭습니다. 드라마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효과입니다. 영화 산업이 어려워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충남 강경의 유지였던 외할아버지께서 어릴 적 바둑을 즐겨 두시던 기억이 납니다. 바둑 TV 방송이나 신문 기보 등을 즐겨 보시곤 했는데, 곁에서 저는 조치훈, 조훈현, 서봉수, 이런 이름을 건너 들었고, 시간이 좀 지나자 괘씸한 신인 이창호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액티브 매니저가 퀀트 매니저한테 인정사정없이 깨지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죠. 저는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하지만 아예 문외한은 아니었고 바둑의 역사는 어느 정도 친숙했습니다. 사실 어릴때의 저는 신문에 나온 거의 모든 것을 다 읽었던 것 같습니다.
조훈현의 책도 괜찮았었습니다.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입니다.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께서 추천했었던 책이었는데, 그 생각법이 트레이더와 비슷했고 승부의 세계는 결국 어딘가에서는 비슷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결국 답은 찾아집니다. 그러나 트레이딩이 가르쳐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듯이 바둑도 가르쳐준다고 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조훈현처럼 기세(모멘텀)와 모양(차트)으로 몰아붙여야 하기도 하고, 이창호처럼 잃지 않는 것이(퀀트와 기계적 매매)가 방법일수도 있겠습니다. 영화에서 말하듯이 자신의 바둑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자기만의 트레이딩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찾은 자신만의 답은 있어도, 둘 다 보편적인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가는 길은 있습니다. 제가 주식을 진심으로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저의 주식 스승님께서는 그러면 아침 5시반에 여의도로 나와라, 라고 하시고는 1시간동안 주식 얘기는 없이 1년 넘게 운동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체력부터 시작합니다. 여튼 마음을 비우되 정성을 다하는 무심과 성의의 자세로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답을 찾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둑을 화려하게 이기는 것처럼 전망을 맞추고 트레이딩 수익을 만드는 것도 즐겁지만, 조훈현이 겪었던 경험과 같이 이제 슬슬 그 다음도 고민하게 됩니다. 이창호와 같은 후계자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좋은 기보를 남기는 것처럼 좋은 글을 남기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때가 오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트레이딩과 승부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영화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둑은 원래 고대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하지만, 근세 이후 바둑 문화를 유지한 것은 막부시대의 일본이었고, 근대바둑의 재창조도 일본에서였습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조치훈, 조훈현이 일본에서 바둑을 배워왔는데, 1980년대 이후 그 둘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바둑을 제패하면서 한국 바둑의 세계 제패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바둑의 역사는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으로 이어졌습니다. 잠시 중국의 커제가 세계 정상에 섰지만 이후에는 인간이 기술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1위는 한국의 신진서가 다시 가져왔지만 AI에 밀리면서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트레이딩도 결국 AI에 밀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게 됩니다.
유아인이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 진짜 이창호를 보는 듯 했습니다. 약을 한게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잘 하는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몇 안되는 최고의 스토리를 살려내 준 영화에 감사하고, 매매쟁이라면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한번 보러 가시기를 추천해봅니다. 내리고 나면 아쉽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