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6일 일요일

<연경, 북경, 베이징>

 <연경, 북경, 베이징>


1. 북경 현황 - 맑은 공기, 남아도는 젊은 인력, 외국인 관광객 없음


지난 주말 금토일 잠시 중국 북경에 다녀왔습니다. 남중국은 가끔이지만 북경은 25년만이었어요. 북경을 자주 다녀온게 아니기 때문에 historical 비교는 어렵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지역과 이런게 다르다 이런거만 얘기할 수 있겠죠. 다만 느낌만 좀 정리해 드린다면..


- 공기가 맑았습니다. 다녀온 주말은 특히 맑았아서 서울과 비슷했습니다. 올해 봄 내내 공기가 서울보다 조금 더러운 정도여서 에어퀄리티 지수는 서울이 60-100 사이인데 북경은 60-140 정도 나오네요. 공장을 안돌려셔인지, EV 전환 때문인지, 고비사막에 나무를 많이 심어서인지, 올해만 이상기후인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튼 우리도 올해 먼지 걱정 없이 봄을 지냈죠.


- 외국인 관광객은 진짜 없어서 공항 국제터미널은 텅 비어 있습니다. 관광객도 동양 뽕 맞은 일부 서양인 아니면 전부 다 내국인. 반면 국내선 터미널은 북적북적. 코로나 이후 특히 심해진듯


- 디스인플레 압력은 여전한 것 같네요. 물건은 넘쳐서 판매점은 항상 뭔가 할인행사를 합니다. 헤어샵에서는 헤어디자이너는 3명 손님도 3명인데 조수는 10명이 넘어요. 젋은 실업이 넘쳐납니다. 그래서인지 음식배달은 갈 때마다 더 발전해 있습니다.


- 여전히 중국 여행은 어렵습니다. 알리페이 띠디추싱 현지폰번호 위챗 VPN 꼭 세팅해야 되고 비자 받는것도 큰 일이고 현금결제도 영어소통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단순 자유여행이라면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도 매력이 있어서 자주 가게는 됩니다만..



2. 북경의 위치 - 농경문화의 북쪽 최전방 기지


북경은 고대 중국에서는 원래 유목민의 지역이었습니다. 전국시대 연 소공이 북쪽 영토 끝으로 이주하며 한족 농경민의 정착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경의 원래 이름은 연나라의 수도라는 뜻인 연경이었습니다. 중국 중원에서는 북동쪽 끝 가장 먼 지역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제일 변방 도시가 지금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북경 바로 북쪽과 서쪽은 산지이고 동쪽은 바다이며 산을 넘어야 동북쪽 만주와 연결됩니다. 산넘어 북쪽 몽골고원에는 흉노, 돌궐, 몽골과 같은 투르크-몽골계 유목민들이, 동북쪽 만주에는 거란, 여진(만주), 고구려, 말갈과 같은 퉁구스계 수렵농경민들이 살았습니다. 북경 근처의 연나라 지방에서는 중국 한족 문화와 북방 유목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났습니다. 


북경은 한족 농경민들의 최전방 전초기지인 동시에 유목민족에게는 남쪽으로 약탈하러 가는 관문이었습니다. 한족은 산맥을 경계로 장성을 쌓았습니다. 진나라때부터 장성을 쌓았지만 명나라때 특히 다시 쌓았습니다. 송나라는 연경의 관문을 확보하지 못해 북방민족이 내려올 때마다 방어할 지형지물이 없었고 항상 털렸습니다. 명나라는 장성은 잘 관리했고 북방민족으로부터 국경을 방어해냈지만 남쪽으로부터 올라온 농민 반란군이 자금성을 함락시켰고 결국 임진왜란을 틈타 힘을 키운 동북의 만주족에게 스스로 장성 동쪽 끝 산해관 관문을 열어주었습니다.



3. 서방/북방유목민 문화- 중국 중근세사에 깊은 영향을 남김


바닷길이 열리기 전 선진문화는 서쪽 사막길을 건너 전파되었습니다. 수도는 서쪽 끝 사막길에 가까운 장안에 있었습니다. 동방은 아직 문화가 일천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북방 유목민은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삼국지시대 이후 북중국이 유목민에게 털린 5호16국 남북조 시대를 지나 수당이 통일했지만 왕실과 지배층이 유목민 출신인데다 문화는 역시 서역 스타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에 가면 남중국의 자본주의적 행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에 가까운 상업민족인 반면, 북중국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데 이게 또 역사적인 연원이 깊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송대 이후 남중국으로 바닷길이 열리면서 사막길의 중요도는 떨어졌지만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유목민의 침입은 더욱 강해져 송은 내내 북쪽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연경과 북쪽 관문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당 멸망 이후 북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북방민족은 현재의 북경을 포함한 장성 내외의 지역을 연운16주라고 하여 합병했고 북방에서 중국으로의 관문은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송은 남중국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고 송원대에도 중국 절반의 주인은 유목민 계열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청나라도 유목민 계열이 지배했습니다.


4. 북경 천도 이후 가까워진 중국-조선


유목국가이면서 북중국을 점령한 여진족 금나라는 수도를 유목계와 정착농민의 경계지점인 연경으로 결정했습니다. 몽골이 중국 전역을 점령하고 나서도 연경 수도 방침을 이어갔습니다. 북방의 국경도시로 시작된 연경은 이제 북방의 국제도시가 되었고 이름도 대도로 고쳤습니다. 북방 유목민/서쪽 색목인(서역인)/남방 한족 농경민이 함께 살던 도시였고 몽골에 점령당한 동방의 고려인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고려 출신 기황후가 대도에서 힘깨나 썼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명나라는 간신히 몽골을 장성 밖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회복했지만 북방민족은 여전히 강했고, 명나라 북쪽 방위를 책임지던 홍무제의 넷째 왕자 주체는 남경을 함락시켜 황제가 되고는 수도를 북방 방위거점인 연경으로 옮겼습니다. 남경에 대응하는 의미에서 이름은 북쪽 수도, 북경으로 정해졌습니다. 중국 한족의 경제의 중심은 당나라 떄 이후 그제나 저제나 남중국이었지만 정치 중심은 북경으로 이동했습니다. 


중국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부터 조선과의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그 전까지 중국이 장안, 개봉, 항주, 남경 등지에 있었을 때에는 중국은 멀고 큰 나라였습니다. 북으로는 거란 여진 유목민에 길이 막혀있고 바다를 통해 건너야 했지만 이제는 수도간 육상 거리가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당과 가까웠지만 바다를 건너 저 먼 서쪽의 장안까지 가야 했고, 송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로부터 찬탈한 조선왕실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명에 충성했고 조공사절은 자주 다녀갔으며 명은 일본의 침입을 보고 조선 출병했습니다. 


청 황조 때도 조선과의 표면적인 관계는 가까워 조공사절이 자주 다녔고, 박지원은 북경에 사절로 갔다가 건륭제가 북쪽 열하의 별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정에도 없던 열하까지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 여정을 열하일기라고 기록했습니다.


청나라 시절 서방 문물은 의주를 통해 들어왔고 조선에서 지역차별을 받던 서북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평양 의주를 중심으로 한 서북 기독교인은 한국 근현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도 서북 기독교인 출신이고 숭실대학교는 원래 평양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서울-북경의 직선거리는 서울-도쿄보다 가깝습니다. 북경이 중국의 수도인 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사실입니다.



5. 자금성에서 중난하이-천안문 광장으로


청 황조 중국의 정치는 역시 북경에서 이뤄졌으나 중요한 문제는 남방의 끝 광저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청 황실은 서양 문물 도입을 성공하지 못하며 붕괴되었고 자금성의 주인 푸이는 궁궐에서 쫓겨나 만주국에서 옹립되며 영화 마지막 황제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의 정치는 자금성에서 중난하이와 천안문 광장으로 옮겨졌습니다. 5.4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 등 인민이 나선 정치 이벤트는 천안문광장에서 발생했습니다. 한반도에서 3.1운동이 있을 동안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발생했고 이후 중국 인민은 현대중국 건설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북경에는 황제는 없어졌지만 1900년 즈음 북경대 청화대 2개의 명문대학이 생겼습니다. 대학생들은 이후 학생의 정치참여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변법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북경대학의 학생은 사회 참여를 주도했고 인문계의 최고 명문대가 됩니다. 미국이 전쟁 배상금을 받지 않고 대신 대학을 지으라며 설립된 청화대는 모택동 시대 공대 구조조정을 거치며 이공계의 최대 명문이 되었습니다.


중난하이(중남해)는 자금성 서편 호수와 정원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원세개(위안스카이)가 북경을 장악한 이후 정부 수장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캐피톨 힐, 한국의 (구)청와대와 같은 느낌입니다. 원세개, 모택동, 등소평 등 중국의 권력자는 중난하이에 거주했습니다. 신중국의 패권을 두고 북중국의 북경과 남중국의 남경이 경쟁했으나 북중국이 승리했고, 남경에 있던 장개석은 일본군에 밀려 충칭으로 도망갔다가 대만으로 재차 도망갔습니다.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한 이래 공산당 내부에는 우파와 좌파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주석 모택동은 좌파, 부주석 주은래는 우파의 상징이었습니다. 인민공화국 역사상 전반적으로 우파가 약세였는데 주은래, 호요방(후야오방), 조자양 등 우파 정치인들이 핍박받을때마다 그들을 지지한 것은 북경의 대학생들이었고 그들은 천안문 광장에 나왔습니다. 


89년 6/4 천안문사태 이후 천안문광장은 금기어가 되었고 정치행위는 억압받았드며 이번에 가서 봤을때는 자금성과 박물관을 보려는 내국인 관광객들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등소평은 우파 좌파간 갈등을 잘 이용하며 개혁개방을 이어갔지만 그런 조정을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등소평 뿐이었습니다. 이후 장쩌민의 상해방, 호요방의 후계자들인 공청단 등이 권력을 다퉜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좌파적 개혁을 내세운 시진핑이었습니다. 남쪽에서 개방과 산업화와 무역과 부동산 붐이 이어지는동안, 북경에서는 중국의 방향이 이렇게 결정되었습니다. 중난하이에는 여전히 시진핑 주석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2024년 3월 17일 일요일

<콩, 장, 한반도 그리고 두부>

 <콩, 장, 한반도 그리고 두부>


1. 도우장, 중국인의 아침식사


중국에서 직구로 도우장 기계를 샀습니다. 한국에서 10만원 하는걸 직구로 2만원이면 사네요. 한국에서 파는 것도 중국 OEM 제조니까, 직구가 늘어날수록 중국 제품을 떼어와서 브랜딩 마케팅해서 한국에 파는 직업은 자리가 없어진다고 봐야겠습니다.


도우장(豆漿, 두장)은 한자 그대로 콩즙, 콩물, 콩국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사람들은 여기에 기름에 튀긴 꽈배기 요우탸오(油条)나 만두, 교자를 곁들여 아침식사로 먹습니다. 20여년 전에 중국어 과외선생님을 따라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콩물과 꽈배기를 사서 간단히 먹는 중국인의 아침식사 습관을 처음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둘 다 처음 보는 거였으니까요.


2. 단백질을 주는 콩, 공기 중에서 질소를 뽑아올 수 있기 때문


식물의 3대 비료가 질소N 인P 칼륨K 이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이게 필요합니다. 인은 뼈나 DNA(DNA내에 인산이 필요합니다), ATP(세포 내 에너지 저장소)에 인이 들어가고, 칼륨은 생명체 내에서 나트륨 등 전해질 농도를 조절하는데 필요합니다. 질소는 그 복잡한 구도 덕분에 생명체의 기능을 제어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구성원입니다. 질소라는게 탄소처럼 이쁘게 결합되질 않고, 다른 분자와 결합할 떄 각도가 삐뚫어지게 되어있어요.


질소, 인, 칼륨보다 더 많이 필요한건 당연히 탄소C 수소H, 산소O 지만, 이건 물(H2O)을 마시거나 광합성(CO2)을 해서 얻을 수 있으니, 456등으로 필요한 NPK가 3대 비료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인과 칼륨도 얻기가 어렵지만, 질소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질소는 공기중에 엄청 많지 않냐? 할 수 있지만 공기중에 있는 질소는 지들끼리 결합해 있어서 아주 단단한 질소분자 N2 형태입니다. 이걸 질소 하나만(질소 이온) 뽑아와서 생명체가 쓰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버-보슈가 암모니아 비료를 만들기 이전, 생명체는 질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다른 생명체의 사체를 통해 얻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물이 죽어 쌓인 퇴적 토양이 비옥한 것이었고, 땅에 질소를 주기 위해 배설물을 비료로 줬습니다. 비료 없이 농사만 지으면 땅에서 NPK가 소멸되고 그러면 지력이 다 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비료 외에 생명체가 질소 이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번개가 치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에너지가 강해서 질소 분자가 쪼개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콩입니다. 콩의 뿌리에는 박테리아가 살고 있는데(뿌리혹박테리아), 이 박테리아는 무슨 영문인지 질소 분자를 쪼개서 수소에 붙여서 암모니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게 만들어지면 생명체는 이걸로 아미노산, 그리고 단백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콩은 그래서 뿌리혹 박테리아의 도움을 받아 단백질을 자체적으로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식물 중에서는 단백질 함량이 제일 높고, 지력이 떨어진 땅에 콩을 키우면 지력이 회복됩니다.


3. 콩의 원산지는 만주, 쌀 문화와 결합한 콩


밀은 터키 서쪽 산간지대, 쌀은 동남아시아나 인도가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콩은 의외로 한반도 바로 근처, 북한과 만주 일대에서 작물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역사와 아주 인연이 깊습니다.


수렵민족인 고구려인은 사냥한 고기에 콩으로 만든 장을 바른 다음 불에 구워먹었다고 전해집니다. 맥적이라고 불리는 이 요리는 아마 지금의 바싹불고기?와 비슷할 걸로 생각이 됩니다. 바싹불고기 별로 안좋아하긴 하는데... 콩을 단기간 발효시켜 만든 장인 청국장이 청나라에서 왔는지 어쩄는지는 학자들이 논쟁중이지만 여튼 청국장도 근원은 만주, 한반도 북부로 추정됩니다. 뭔가 좀 친근한 느낌이 있죠..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는 메주도 만들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큰 항아리에 장을 담가 보존하고 삭히는 문화는 사실 중국에서 기원했습니다. 만주의 콩 문화와 중국의 독 문화가 합쳐져, 콩을 항아리에 발효시켜 장, 소스를 만드는 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동아시아 농경문화에 2가지 장점을 보태주었는데, 일단 하나는 음식이 맛있어졌다는 것입니다. 단백질 자체도 맛있지만, 단백질이 분해되어 아미노산이 되면 혀에 감칠맛을 자극해 맛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고기 없이도 감칠맛을 낼 수 있는 재료는 콩, 다시마 정도 뿐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목축이나 낙농 없이도 단백질 공급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동남아/인도에서 시작된 쌀농사는 후덥지근한 여름 몬순 기후 지방에서 수확량이 많고 맛이 좋아 동북아시아까지 급속하게 퍼졌는데, 단백질 함량이 낮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시아 농민들은 단백질 보충을 위해 논에서 나는 민물고기를 수확철마다 논에 물을 빼고 잡아다가 장을 담그거나(젓갈, 피쉬소스), 개나 닭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고 콩은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었죠. 


특히 한국에서 장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밀과 면도 소비한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은 식단이 쌀밥+나물+김치로 고정되면서, 쌀밥을 더 맛있게 먹고 단백질도 공급할 수 잇는 식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나물 좀 뜯어서 넣고 된장을 푼 된장국은 영양 면에서도 맛에서도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중국이 밥을 기름에 볶아서 먹고, 일본이 밥에 뭘 덮어서 먹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한국은 밥을 국에 말아서 먹고, 그래서 숫가락도 쇠숫가락을 쓰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모두가 콩 덕입니다. 


4. 우유로 치즈를 만들듯이, 콩물로 두부를 만들다


두부를 만드는 방법은 잘 아실겁니다. 콩물에 마그네슘 등이 섞인 간수를 넣으면 단백질이 서로 붙어 응고됩니다. 단백질끼리 붙어 가라앉으면서 물은 빠지고 엉겨붙은 두부만 남습니다. 이건 의외로 치즈를 만드는 방법과 거의 같습니다. 


치즈도 단백질 물인 우유에 단백질을 엉기게 하는 효소(레닛)을 넣어서 단백질을 굳힌 것입니다. 단백질만 빠져나오면 치즈가 되고, 치즈가 빠지고 남은 물은 유청이라고 해서 먹던지 여러가지로 따로 씁니다. 우유에서 두부처럼 단백질을 굳힌게 치즈고, 우유에서 거품을 걷어내서 기름만 따로 뺴낸게 버터입니다. 둘은 아예 다릅니다.


치즈가 발효식품 어쩌고 하는건 이 이후의 일입니다. 굳어진 단백질은 당연히 온갖 생물의 먹잇감이 되고, 오래 보관하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균에게 맡겨두는게 그나마 나은 방법입니다. 두부도 오래 저장하기 어렵고, 발효를 시키면 좀 낫습니다. 두부를 발효시켜서 먹기도 합니다. 취두부라고... 사실 후랑스 이태리 치즈 똥냄새는 좋다고 하면서 중국 취두부 썩은내는 미개하다고 싫어하는 것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넘이 그넘입니다.


두부는 사실 꽤 최근에 생긴 음식입니다. 치즈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것과는 달리.. 하지만 둘의 만드는 방법은 너무 비슷합니다. 명나라때 조선 두부가 괜찮았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 전에는 두부 얘기가 잘 안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몽골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꼭 몽골 떄문이었는지, 아님 그 전부터 있었는데 몽골 점령 떄문에 퍼졌는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심증은 있습니다. 치즈와 두부는 만드는 방법이 너무 꼭 같으니까요.


우동, 교자 같은 것들이 중국에서 직접 일본에 전해진데 반해, 두부 제조 방법은 도자기 등과 함께 임진왜란때 많이 한국에서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납치와 강제력으로 넘어갔겠습니다만.. 이제와서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두부를 더 열심히 만들고 소비합니다. 반면 한국은 치즈 올려먹는게 유행이라 일본에서 한식은 매운 요리에 모짜렐라치즈를 얹는 거라고 하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양넘들이 열심히 되도않는 fake meat 개발을 고민할때 우리는 두부가 더 낫지 않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욘드미트고 나발이고 두부김치나 드셔봐..

<연경, 북경, 베이징>

 <연경, 북경, 베이징> 1. 북경 현황 - 맑은 공기, 남아도는 젊은 인력, 외국인 관광객 없음 지난 주말 금토일 잠시 중국 북경에 다녀왔습니다. 남중국은 가끔이지만 북경은 25년만이었어요. 북경을 자주 다녀온게 아니기 때문에 hi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