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3일 일요일

<조훈현, 이창호의 승부>

<조훈현, 이창호의 승부>


조훈현, 이창호의 사제간 바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승부>를 보았습니다. 참 좋더라구요. 어쩌면 영화가 좋다기보다는 재료가 좋았었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일이 많았던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 정도 소재는 흔치 않습니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재료라는데 영화도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재료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잘 풀어내 주었습니다. 조금 아쉬운 듯 하니 욕심이 날 법도 하지만 양념하지 않고 담백한 한 끼를 내놓았습니다. 이정도면 감독에게 고맙습니다.


영화라는 장르를 사랑합니다. 요즘은 미디어 산업이 드라마로 많이 넘어가는데 드라마는 서사가 늘어지는 감이 있어 선호하지 않습니다. 수십부작을 어떻게 다 보겠으며 시간을 쏟아부을만큼 여유롭지도 않습니다. 보겠다고 점찍어둔 NHK 사극 리스트는 은퇴하고 나서야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영화는 2-3시간이라는 짧은 순간에 간접 경험을 쥐어짜내는 느낌입니다. 관점은 다양하고 감각은 새롭습니다. 드라마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효과입니다. 영화 산업이 어려워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충남 강경의 유지였던 외할아버지께서 어릴 적 바둑을 즐겨 두시던 기억이 납니다. 바둑 TV 방송이나 신문 기보 등을 즐겨 보시곤 했는데, 곁에서 저는 조치훈, 조훈현, 서봉수, 이런 이름을 건너 들었고, 시간이 좀 지나자 괘씸한 신인 이창호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액티브 매니저가 퀀트 매니저한테 인정사정없이 깨지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죠. 저는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하지만 아예 문외한은 아니었고 바둑의 역사는 어느 정도 친숙했습니다. 사실 어릴때의 저는 신문에 나온 거의 모든 것을 다 읽었던 것 같습니다.


조훈현의 책도 괜찮았었습니다.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입니다.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께서 추천했었던 책이었는데, 그 생각법이 트레이더와 비슷했고 승부의 세계는 결국 어딘가에서는 비슷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결국 답은 찾아집니다. 그러나 트레이딩이 가르쳐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듯이 바둑도 가르쳐준다고 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조훈현처럼 기세(모멘텀)와 모양(차트)으로 몰아붙여야 하기도 하고, 이창호처럼 잃지 않는 것이(퀀트와 기계적 매매)가 방법일수도 있겠습니다. 영화에서 말하듯이 자신의 바둑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자기만의 트레이딩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찾은 자신만의 답은 있어도, 둘 다 보편적인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가는 길은 있습니다. 제가 주식을 진심으로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저의 주식 스승님께서는 그러면 아침 5시반에 여의도로 나와라, 라고 하시고는 1시간동안 주식 얘기는 없이 1년 넘게 운동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체력부터 시작합니다. 여튼 마음을 비우되 정성을 다하는 무심과 성의의 자세로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답을 찾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둑을 화려하게 이기는 것처럼 전망을 맞추고 트레이딩 수익을 만드는 것도 즐겁지만, 조훈현이 겪었던 경험과 같이 이제 슬슬 그 다음도 고민하게 됩니다. 이창호와 같은 후계자를 어떻게 기를 것인지, 좋은 기보를 남기는 것처럼 좋은 글을 남기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때가 오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트레이딩과 승부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영화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둑은 원래 고대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하지만, 근세 이후 바둑 문화를 유지한 것은 막부시대의 일본이었고, 근대바둑의 재창조도 일본에서였습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조치훈, 조훈현이 일본에서 바둑을 배워왔는데, 1980년대 이후 그 둘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바둑을 제패하면서 한국 바둑의 세계 제패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바둑의 역사는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으로 이어졌습니다. 잠시 중국의 커제가 세계 정상에 섰지만 이후에는 인간이 기술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1위는 한국의 신진서가 다시 가져왔지만 AI에 밀리면서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트레이딩도 결국 AI에 밀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게 됩니다.


유아인이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 진짜 이창호를 보는 듯 했습니다. 약을 한게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잘 하는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몇 안되는 최고의 스토리를 살려내 준 영화에 감사하고, 매매쟁이라면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한번 보러 가시기를 추천해봅니다. 내리고 나면 아쉽습니다.

2025년 1월 30일 목요일

<호북성, 우한, 그리고 양무운동>

 <호북성, 우한, 그리고 양무운동>


중국 호북성, 그러니까 장강(양쯔강)의 중류 지역이면서 삼국지 시대에는 형주 북부라고 불렸던 지역에 대한 미뤄뒀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거 얘기하는 타이밍 재는게 어렵네요 연휴에는 또 딥싴 사태가 터지질 않나.. 호북은 장강 중류 지역인데 여기까지 큰 배가 수월하게 들어옵니다. 서북쪽 한중 땅에서 내려오는 한수와 합류하기도 하고, 지대가 전반적으로 움푹 패여 있어서 호수가 많습니다. 이게 삼국시대에 조조가 어쩔 수 없이 배를 만들어서 해전을 치러야만 했던 지리적 어려움을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현재 이 곳은 중국 내지, 그러니까 서북이나 동북 등을 제외하고 한족이 대부분 사는 중국에서도 한가운데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심 도시 우한은 바이러스 사태의 진앙지이면서도 교통의 중심지여서 확산 우려가 더 컸었죠. 아주 오래 전 춘추시대나 그 전 주나라 시대에는 여기를 사실 중국으로 끼워주지도 않았습니다. 은주혁명에서 100년도 지나지 않은 때 주나라 소왕은 이 지역을 공격하다가 배가 침몰해서 죽었다고 씌여 있습니다. 역시 배와 호수 이야기입니다. 중국 남부의 이민족으로 평가되었는데 이제는 중국 대륙의 한가운데가 되었으니 중국이 마인부우처럼 얼마나 주변국을 흡수합병했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우리도 주의해야겠지요..


이렇듯 이민족의 땅이었던 이 지역은 형초, 묘족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을 형주, 초(䠂)나라라고들 부릅니다. 전국시대의 초나라는 애초에 중원의 주나라와 다이다이 뜨던 중국 밖의 실력자답게 가장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초나라 문화가 중원(장안/낙양)에 비해 뒤져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요즘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을 보면 대단히 훌륭해서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더군요. 하지만 동남 해안 강남지역에서 발흥한 오나라에게 수도를 한번 털리기도 하고, 전국시대가 지날 수록 서쪽의 진(秦)나라에게 시도때도없이 털리게 되었습니다. 진은 장강 상류 사천지방의 촉나라를 점령/개발해 상류라는 우위를 가져갔고, 법가(法家)사상을 받아들여 국가가 부강해졌습니다. 가장 강성했던 나라가 매번 털리고 왕이 외교 사기를 당해 사로잡히고 얼마나 지독하게 패배하고 수모를 겪었던지 한이 서렸습니다. 중국 최초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초나라 중신 굴원은 억울해 호수에 빠져 자결했고, 통일한 진나라를 다시 무너트린 초나라 장군가문 출신 항우는 결국 몰락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 지역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하고 여기에 행정 중심구역인 군을 세웠습니다. 36개 군이 있었고 남쪽이라 남군이라고 했습니다. 도시 남쪽으로 장강에 닿습니다. 남군은 한나라/삼국지 시대에는 강릉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형주 지역 전체의 치소가 되어 형주성이라고도 했습니다. 지금 이 지역의 이름도 형주(JingZhou)입니다. 삼국지 시대 관우가 주둔하던 지역입니다. 지금 형주에는 한나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성곽이 건재하고 내부는 아직도 도시의 중심지역입니다. 시에서 몇년 전 거대한 관우 상을 세웠는데 너무 거대한 나머지 불법건축물이라고 철거되어 없어져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관공이 그렇게 또 가시었습니다...;; 어찌하여 불법건축물이 되시었소... 형주시에는 임진왜란을 겪는 조선을 엄청나게 밀어줘서 조선황제라고도 불렸던 명나라 만력제의 스승인 장거정의 저택도 있었습니다.


호수가 많던 지역이라 그런지 식재료가 아주 다양한것이 지역 음식의 특징입니다. 민물생선은 기본이고 가재, 자라... 뭐 민물에서 나는건 다 먹는 느낌입니다. 사실 민물에서 나는 식재료가 제일 진입장벽이 높았던것 같습니다... 거위 목도 인기였고.. 초나라 정찬 메뉴를 몇개 시켜보긴 했는데 재료 탓에 참 먹기 어려웠습니다. 박쥐를 먹는 문화가.. 호수가 많은 지역 특징으로 이해하자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졋는지 핑계를 박쥐로 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삼국지 시대 이 지역은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지역이었습니다. 중국 한가운데라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갈량은 형주와 촉을 가져가고 동으로 오나라와 화친하면 북쪽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남쪽 남군에는 촉의 관우가, 북쪽 양양/번성에는 위나라의 만총과 조인이, 동쪽에는 오나라의 여몽과 육손이 있었습니다. 남군에서 출발한 관우는 북으로 진격해 양양을 함락시키고 번성을 포위했습니다. 양양은 한수의 남쪽에, 번성은 한수의 북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남쪽에서 공격을 받을 때는 한수 건너 번성이 요새가 되지만 북쪽에서의 공격을 방어할때는 남쪽의 양양이 요새가 됩니다. 번성은 관우의 공격을 기어코 막아냈는데 약 1000년 후 양양은 남송의 최전방기지로 북쪽에서 오는 몽골군의 공격을 수십년간 막아냈습니다. 양양과 번성은 이제 하나의 도시로 합쳐져 양양시(Xiangyang)가 되었는데 양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동쪽에는 오나라 손권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서북쪽에서 내려오는 한수와 서에서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장강이 만나는 지역을 하구, 강하라고 불렀습니다. 송나라때 악주라고도 불렸던 강하군은 지금의 우한시입니다. 손권은 새로 점령한 형주와 본진인 강남(장강 하류) 지역의 연결지역이자 강남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강하를 발전시켰습니다. 손권은 이 지역에 황학루라는 군사기지 겸 누각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북중국에서는 유목민들의 전란이 끊이지 않았고 유민들은 계속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형주와 강남을 잇는 이 지역의 중요성이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원나라 멸망때까지 중국은 남북 분열이 정상이었고 양양은 북방의 최전선이 되었으며 형주의 중요 도시는 강릉에서 우한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송나라가 몽골군의 침입을 방어하던 이야기는 김용의 무협소설에도 많이 나오지요..


명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남북 대치상황이 끝나면서 인구가 이 지역으로 다수 이주했습니다. 드넓은 호수도 상당부분 간척되어 농지가 되었고 인구는 증가했습니다. 쌀 생산이 늘어 장강 하구 지역과 상업교역이 활발해졌습니다. 어차피 배를 타면 편히 다닐 수 있는 지역입니다. 하운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우한은 더더욱 번영했습니다.


청나라때도 중요성은 낮지 않았지만 청말에 이르러 진짜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지고 난 후 도시를 하나하나 개항하며 조계지를 허용하고 이권을 빼앗기기 시작했습니다. 동남쪽 홍콩에서 샤먼, 주산열도를 따라 해안을 타고 올라온 영국 세력은, 상해를 찍고서는 장강 내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장강 중류의 우한, 상류의 충칭에도 영국 조계지가 생겼습니다. 강 상류까지 들어간 영국넘들 정말 지독합니다. 중국에서 가장 경제가 발전된 알짜지역만 쏙 빼먹었습니다. 지금도 영국에서 가장 큰 은행 이름이 홍콩상하이 은행(HSBC)입니다. 


아편전쟁에서 지고도 정신 못차리던 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지고 깜짝놀라 철도를 놓았습니다. 수도 북경에서 남쪽 광주까지 철도를 놓을 계획이었습니다. 북경에서 출발한 철도는 우한 북쪽 한구까지 놓였습니다(경한철도). 아직 장강에 다리를 놓는 기술은 없었고, 어차피 장강을 건너려면 여기에서 배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철도와 하운의 환승지역으로 우한은 더욱 발전했습니다. 이때부터 정말 중국의 교통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장강에 다리가 놓인 것은 인민공화국이 전국을 통일한 후 1960년이 되어서입니다. 그제서야 북경에서 광주까지 한번에 철도를 타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경광철도).


서양의 기술을 베끼자는 양무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계지에 영국 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넘들까지 다 들어와 있었습니다. 어차피 개방하는거 열심히 남의 것 베껴서 산업을 육성하자고 제철소가 들어섰습니다. 임칙서로부터 시작해서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의 양무운동 1세대를 지나, 호남호북에는 장지동, 강소절강에는 유곤일, 북경하북에는 원새개 등의 2세대가 이를 이어갔습니다. 사실 중국의 양무운동은 사후의 평한과는 달리 꽤나 치열한데가 있었습니다. 중국의 거대한 규모, 서태후 등 황실 보수파의 권력투쟁 문제, 만주족/한족 간 민족 갈등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런 구조적인 한계가 아니었다면 일본처럼 성공했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입니다. 하지만 결국 청일전쟁의 패배에 실력을 드러냈고 의화단 반란 때 청 황실은 반 외세에 가담하며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근대화하는 청나라에서 중요해진 우한에서, 혁명이 터지면서 정말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신식 군대가 주둔했던 우한에서, 오히려 신식 군대는 만주족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반 청나라 독립운동은 홍콩의 영향을 받았고 북경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던 광동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우한의 혁명 이후 장강 유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11년 우한 신식 군대의 반란은 전국 신식 군대의 동참을 이끌며 성공했고 해외에 망명해있던 손문은 부리나케 귀국했습니다. 이를 1911년 신해혁명이라고도 하고 쌍십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렇게 성립된 중화민국의 주요 도시는 상해, 남경, 우한, 중경, 광주가 있었고, 북중국에는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북중국에서 시작한 모택동의 공산당이 중일전쟁의 여파를 이용해 중국 전역을 통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20세기 중국의 혼란은 양무와 변법의 연장선상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홍장의 양무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던 정원 진원을 가지고도 일본의 벌쳐짤짤이에 아무고토 못하고 패배하면서 강유위의 변법운동이 나타났고 서태후 탓에 그걸로도 답이 안나오자 손문의 민주혁명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사회는 결국 민주주의를 소화하지 못하고 황제 독재의 역사에 동구권식 사회주의를 결합한 중공체제로 귀결되었습니다.


현대 중국에서도 기술 측면에서는 양무운동의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 AI 반도체 로봇굴기로 나타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튼 베끼는건 탁월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AI 베끼기와 과거 거함거포 베끼기는 비슷한데가 있습니다. 청나라 황실에 대한 개혁 없이 전함과 대포만 도입하면 된다는 양무운동과, 시진핑 사회주의에 대한 개혁 없이 AI와 반도체만 베끼면 된다는 중국굴기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제도의 변화 없이 기술 도입만으로도 중국의 굴기가 가능할까요? 여튼 150년 전에는 변법 없이 양무만으로는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장강을 거슬러올라가 사천성(촉)에 대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형주에서 촉에 들어갈때 제갈량은 조운을 데리고 강을 따라서 편하게 올라가면서 장비더러는 산길을 따라서 힘들게 오라고 했었지요.. 저는 세상이 좋아져 침대열차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조훈현, 이창호의 승부>

<조훈현, 이창호의 승부> 조훈현, 이창호의 사제간 바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승부>를 보았습니다. 참 좋더라구요. 어쩌면 영화가 좋다기보다는 재료가 좋았었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일이 많았던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