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9일 일요일

큐슈 이야기

 

1. 일본의 입구, 큐슈

1) 빛은 서방으로부터

큐슈는 일본의 가장 서쪽이면서 대륙과,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가까우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좋은 관계로, 때로는 악연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의 중심이 근세 이전까지는 교토(간사이), 근세 이후부터는 에도(도쿄)가 중심이 되었다면, 그 전 고대 시대의 중심은 큐슈였습니다. 빛은 서방으로부터 왔습니다. 이건 사실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마찬가지이긴 했습니다. 문명이든 불교든, 육로든 해로든, 빛은 문명의 개화가 빨랐던 서방으로부터왔고, 특히 고대의 선진문물이었던 불교는 서쪽 인디아로부터 왔으니까요.


2) 백제와 큐슈

이 시기 한반도는 중국애서 한국으로 그리고 그걸 다시 일본으로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왕인 박사라던지.. 역사책에 많이 나오는 얘깁니다.

백제는 개로왕의 대패 이후 한강 유역을 잃어버리고 금강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을 털렸죠.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하느냐의 과정에서, 일본의 힘을 빌린 것도, 중국 남조와의 관계를 확보한 것도 부흥 요인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기에 중국 남조.. 중국도 북쪽은 유목민계열에 털리고 남조만 유지되는데 그 남조와 해양 교류를 하며 한반도 삼국 중 중국 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그러니까 요새말로 테크트리를 빨리 올린.. 그런 성과를 가져왔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전북 익산, 그러니까 백제의 마지막 도시 출신이고, 아내는 잠실 올림픽공원, 백제의 첫 도시 위례 출신이라 백제에 대해 좀 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 백제의 웅진 시기의 부흥을 이끈 무령왕은 일본 출생이고, 그 이후에도 백제왕실과 일본의 관계는 각별합니다. 이후 사비성에서는 방계가 왕위를 이어받는 사이 오히려 임성태자와 같은 백제왕실은 일본에 정착, 이후 전국시대 주요 다이묘인 오우치 가문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백제 이전에도 전남 나주 등지와 규슈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전방후원군 고분이나, 한반도의 영향이 있어보이는 큐슈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 등... 큐슈와 한반도 남쪽의 관계는 따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빛은 한반도로부터, 가장 서쪽인 큐슈로 왔습니다.


2. 견당사의 출발점, 하카타

1) 백제와 신라

여튼 아는대로 여차저차 백제는 망하고 일본 입장에서 적국인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지금의 후쿠오카 동부는 이전에 하타카(박다) 라는 이름으로 불린 항구였습니다. 신라의 침략이 걱정된 일본은 하타카에서 한참을 내륙으로 물러난 관문에 성을 쌓고 해자를 둘러 미즈키(수성)이라 불렀고, 그 뒤에 큐슈의 관청 다자이후(대재부)를 두었습니다. 

이후 백제인은 일본에서 활동을 이어갑니다. 큐슈지방을 거쳐 간사이 지역에서 아즈카 시대를 거쳐 나라의 귀족 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백제를 일본어로는 구다라.. 라고 읽는데 어원은 불명이나 백제=큰 나라 에서 구다라 라는 말이 왔다는 설이 우세하며, 나라 시대의 수도 나라는... 우리말 '나라' 에서 왔다는 설이 우세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2) 견당의 시대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사 거장 에즈라 보걸은 이 시기를 일본이 중국에 배웠던 시기라 표현합니다. 1880년이 되면 다시 중국이 일본에게 배우게 되지만 청일전쟁 이후가 되겠지요. 일본은 신라 통일로 관계 껄끄러워진 한반도보다 직접 당나라와 교류할 생각을 합니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계와의 협력 혹은 숙청을 통해 일본 정권 창출에 성공했고,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냅니다. 

견당사는 당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200년간... 10-20년에 한번 꼴로 계속됩니다. 천태종을 가져온 최징(사이초), 밀교를 배워온 공해(구카이) 그리고 당 말기를 잘 묘사한 원인(엔닌)... 등이 유명합니다. 그리고 공해는 우동을 일본에 가져왔다는 전설적인 인물이 됩니다. 하카타에서 배가 떴고, 대부분이 승려였던 견당사는 당나라에서 십수년 유학을 한 후 하카타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하카타에는 견당 시절의 불교사찰이 남아있습니다.


3) 우동과 가라아케

우동, 라멘도 규슈가 메인이라는건 잘 아실거에요. 후쿠오카 이치란라멘 앞에 가 보면 진짜 줄이 개난리판인데... 큐슈가 면으로 개난리인 이유는 공해가 우동, 즉 면을 가져온 곳이 당연히 견당사 시점/종점인 하타카이기 때문이겠습니다. 배워온 면이지만, 일본인들은 진짜 면에 진심인거 같다는 생각이.. 한국이 국물에 진심이라면 일본은 면에 미쳐있는데 제가보기에는 글루텐 쳐서 쫀득쫀득해진 식감을 좋아하는거 아닌가.. 라고 보여서 글루텐프리 외치는 서양인들과 정반대 아닌가 싶지만.. 머 그렇습니다. 

가라아게도 큐슈가 메인. 제일 잘 튀긴 가라아케집 그랑프리가 있는데 대부분이 큐슈에 위치합니다, 가라아케에 진심인데 가라아케의 가라는 한자로 당나라의 당을 의미합니다. 중국에서 배워온 방법으로 닭을 튀긴 모양이죠. 중국 하면 당나라였으므로 당이 써 있으면 중국식이라는 얘깁니다. 당진은 당나라로 가는 항구라는 뜻입니다. 한국에도 당진이, 일본 규슈에도 당진(가라쓰)가 있습니다. 하카타에서 좀 더 서쪽입니다.


4) 무역의 시대: 송/원, 고려 시대

당나라가 망한 후 견당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송나라 원나라 때 동아시아 무역은 더욱 활성화되었습니다. 

망한 중국에서 더 배울게 없다고 생각하자, 일본에서는 국풍 문화라는 스타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본의 특색있는 문화는 이 떄부터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하타카에서 중국 강소/절강으로 가는 길 한가운데에 제주도나 완도가 있습니다. 신라 말 장보고가 여기에서 한따까리 하기도 했었구요,

수년 전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했던 신안 앞바다 도자기.. 그것도 배는 일본 하타카 배, 도자기는 송/원나라 도자기입니다. 하타카 가는 길에 한국 신안에서 침몰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것은 아닌 셈이긴 합니다. 고려시대 개성 벽란도, 하카타, 중국 북부, 중국 남부간의 무역은 이렇게 활발했습니다. 

원나라때 잠시 몽골이 고려, 송나라 군을 이용해 일본을 침략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때도 침략 목적지는 하카타였습니다. 하타카에는 당시 몽골/고려군이 침입할 때의 전투장소, 성곽 같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태풍때문에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3. 네덜란드와 나가사키

1)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1500년 포르투갈인의 인디아 도착과 함께 인도양 무역에 서양인이 개입하게 됩니다. 콜롬버스의 1490년 신대륙 발견에 큰 의미를 두는 얘기가 많지만 그거야 미국 입장에서 지네 역사니까 그런거고, 세계사적 입장에서는 유럽이 아시아와 직접 연결되었다는 점이 더 크다고 봅니다. 그 전까지는 알렉산드리아에 베네치아 배가 들어와서 후추를 받아가던 입장에서, 서양인들은 세계 무역에 직접 들어왔고, 대포와 범선으로 이를 하나하나 접수합니다.

포르투갈은 인도 서해안 고아(Goa)에 거점을 마련하고 말라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의 입구 마카오, 대만의 단슈이, 그리고 일본의 나가사키에까지 다다릅니다. 일본인에게 조총을 보여주었고 전국시대 전쟁 개빡세게 하던 일본인들은 조총을 빠른 시간 내 베껴 전국 통일에 사용하고 이후 임진왜란까지 일으킵니다.

카톨릭을 믿고, 강경한 십자군과 같았던 포르투갈 함대는 아시아에서는 이슬람세력의 저항에, 본토에서는 스페인의 위협에 몰락합니다. 포르투갈이 닦아놓았던 북아프리카-브라질-남아프리카-동아프리카-인디아-말라카-중국/일본의 루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가져갑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영국이 접수하게 되는데 영국은 나중의 일이죠...


2) 난학과 근대화의 준비

서양인과의 무역이 중요해지면서 하카타 대신 나가사키가 부상합니다. 남서방향에서 온 서양인들은 나가사키에 기항했습니다. 네덜란드인은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상륙을 허가받고 무역을 하고 학문, 특히 서양의학과 세계 정세를 전달했습니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 학문을 배우고 어학 사전을 편찬했습니다. 서양의 외과의술을 배웠습니다.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사실 난학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근대 어휘는 서양의 개념을 어떻게 한자어로 번역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일본인의 고민에서 기인한 것이 많습니다. 

서양 문물의 선구지로서 나가사키는 개항 이후에도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근대화의 주요 인물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꿈을 키웠고 미쓰비시는 나가사키에서 상사로 시작해 조선업 등 중공업으로 발전했다가 군수산업 전범기업이 되었습니다. 료마는 미쓰비시 상사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1900년 이후에도 나가사키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서구 학문의 선구지역으로 이를 배우러 온 유학생들이 넘쳐나던 곳이었습니다. 손문도 망명을 왔고 서양문물을 배우러 온 중국인들로 인해 짬뽕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면과 우동의 지역 큐슈, 나가사키에서 중국 유학생들에 의해 중국식 스타일로 만들어진 중식 우동인 나가사키 짬뽕이, 화상 교역망을 통해 인천으로 들어왔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고춧가루를 태워서 빨간 짬뽕이 되었습니다.
   

4. 근대 개항과 기타큐슈

1) 페리 제독과 키타큐슈 개항

미국 페리제독의 개항은 일본 근대의 시작 상징입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털린지 10년 후 1850년대, 미국에서 태평양을 넘어온 증기선이 넘어와 에도를 위협했고 일본 막부 정부는 굴복했습니다. 이제까지 큐슈가 일본 열도의 프론트라인이었고, 외적이 침입해도 큐슈로 왔었습니다. 대양을 건너 뒷문으로 들어오니 답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요구에 간토의 요코하마 / 간사이의 고베 / 큐슈의 키타큐슈(모지코)를 새로 개항했습니다. 

키타큐슈의 모지코, 그리고 바다 맞은편의 시모노세키는 이제까지 역사에 중요하게 나오지는 않았었습니다. 조선 초까지 앞서 나왔던 하카타가 중요한 항구였고, 조선 후기 들어서 조선통신사가 시모노세키에 기항하고 세토나이카이를 통해 이어지는 바닷길로 오사카에 다다른 후 육로로 에도에 가는게 일반적인 교통편이 되는 정도였습니다만, 키타큐슈는 이제 중요한 개항장이 되었습니다.

개항 이후 일본은 혹시나 식민지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근대화에 대한 강박이 있었고, 빠르게 공업화를 진행했습니다. 나가사키에는 미쓰비시의 조선소가, 키타큐슈에는 야하타 제철소(현 신일철)가 들어섰습니다. 마침 규슈 북부에서는 석탄 광산이 개발되어 공업화를 도왔습니다. 큐슈의 철도는 이곳 모지코로부터 시작했습니다. 큐슈 북부의 동아시아 최초 공업단지들은 일본의 근대화와 군사국가화를 도왔고, 태평양전쟁 때 조선의 징용공이 붙잡혀 갔던 곳이며 미군 항공 폭격의 중심지였고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 정한론과 조슈번

키타큐슈의 모지코와 맞은편 시모노세키는 일본 근대화의 프론트라인이면서 대륙 침략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시모노세키를 한국 사람이 이름이라도 잘 아는 이유는 시모노세키 조선통신사 떄문이기도 하지만, 청일전쟁의 결과 조약이 여기에서 서명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지고 조약을 서명하러 온 청나라의 대빵 이홍장은 시모노세키에 왔다가 일본의 열혈 애국주의자 자객에게 총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고, 세계 여론은 청나라를 동정했으며, 일본 대표인 이토 히로부미는 자객 때문에 협상을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며 매국노같은 놈이라 비난했습니다. 10년 후 러일전쟁 승리 후 요동반도 끝 뤼순을 받아낸 일본은 모지코-뤼순 급행을 운영했습니다. 뤼순의 일본 기반은 결국 남만주철도와 만주국으로 이어졌습니다.

시모노세키는 지금의 야마구치현, 예전으로는 조슈 번에 속했는데 사쓰마번(가고시마)와 함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이끈 지역이면서 지금도 일본 극우의 정치적 기반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도, 작년 암살당했던 아베 신조도 야마구찌 출신입니다. 정한론을 처음 말한 요시다 소인도 야마구치 조슈 출신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소인의 제자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자가 맞다 아니다 말은 많지만 안중근 의사로부터 암살당한 후 한일합방은 이뤄졌고, 아마 당시 정황상 1인이 막고 할 문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대화 이후 사쓰마는 일본 해군을, 조슈는 일본 육군을 장악했습니다. 일본 육군 군부는 우경화해서 1930년대 이후 급발진, 정부 내각 암살, 권력 확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까지 치닫고는 망해버렸습니다. 어쩌면 백제 유민이 가장 많이 건너간 지역이고 조선과도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지만 그만큼 가까웠기에 조선과 갈등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아이러니를 가진 지역입니다. 아직도 야마구치현은 일본 우파의 지역입니다.
    

3) 쇠락한 큐슈

여튼 일본은 태평양전쟁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습니다. 미 공군은 군수공장이 들어서있던 키타큐슈에 폭격을 쏟아부었고, 근대화와 유신의 심장 나가사키에는 핵폭탄을 꽂았습니다. 나가사키에 핵 폭격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평화의 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일본의 과도한 군국주의와 실패는 다음 세대의 반성을 불러왔고 전후세대에는 좌파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평화의 공원에는 1970년대에 조총련계 인사들이 세운 조선인 희생자 기념탑과 일본 좌파의 사죄문이 있었습니다. 
    
전후 일본 경제를 상징하는 기업인 소니는 도쿄에, 도요타는 나고야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대륙과의 연계를 버리고 대신 미국으로의 수출을 택한 일본의 경제는 동쪽으로, 수도권으로, 태평양 무역으로 중심이 옮겨갔습니다. 도쿄에 4천만 인구가 살 동안 큐슈는 침체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이 부상하면서 규슈 경제가 조금 살아나나 하는 정도였지만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규슈 출신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정도만 보이네요. 한국, 중국 관광객이 내수를 살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산업적으로는 쇠락하였으나 여전히 나가사키의 조선소는 돌아가고 있고 도시의 낡은 트램은 관광객을 실어나르며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5. 스즈메의 문단속

1) 집단적 참사의 기억

최근 한국에서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가 흥행하고 있고, 저도 주말에 보고 왔습니다. 동 감독의 이전 작품인 [너의 이름은]에서 느꼈던 그 참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집단적 감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려 중국에서까지 흥행 중이라고 하네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11년 후쿠시마 쓰나미 대참사 이후 작품의 방향을 좀 바꿨습니다. 3/11이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은 모두 다 아는 트라우마의 날입니다. 대참사가 있은 지 12년이 흘렀습니다. 한국에도 여러 참사가 있기는 했지만, 2만명 이상이 사망한 이 사건과 그 규모에서 비할 재난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죠. 세월호든 이태원이든 참사를 겪었으니. 

이렇게 집단적 아픔을 이렇게 극복해가는 일본의 모습을, 집단적 기억의 치유를 영화는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 작품에서는 감히 대지진을 직접 얘기하지는 못하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이번 작품은 11년 전의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하고, 이렇게 풀어버리고, 삶의 의지와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도 제시해주려 하고 있어요.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2) 1500년을 넘게 이어온 동아시아의 교류 

스즈메의 문단속 OST에 공감이 간다는 한국인들의 평이 많습니다. 저도 영화에서 마쓰다 세이코 노래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세상에... 세이코의 [Sweet Memories]는 산토리 맥주 광고로 유명해진 노래인데 거까지 나오더라구여.. 사실 K팝의 근원도 어느정도는 J팝에 있어서... 80년대 일본 버블기의 음악과 90년대 김대중-오부치 이후 일본문화 개방에 대해 인정해야 K팝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슬램덩크 신드롬도 있고, 일본에서는 K팝 인기가 대단하고.. 서로 상대의 문화컨텐츠를 즐기는데, 앞서 설명드렸듯 동아시아의 교류는 1500년을 넘어 이어진 흐름입니다. 특히 일본과는 악연이 되었지만 같은 문화적 맥락 안에서 근대화 현대화를 이뤄냈습니다. 공감가는게 많을 겁니다.

저는 지난 3월 마지막 주 키타규슈-후쿠오카에 다녀왔어요. 한국 사람들 정말 많았습니다. 최근 일본 여행을 많이들 가지만, 가서 맛있는걸 먹고만 온다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영화를 이웃나라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봄이 어떨까 합니다. 방사능 어쩌고 하면서 조롱하기에 앞서, 어떤 역사를 살아왔는지, 그리고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를 이해하기를 원하고, 이웃나라의 참사와 그를 극복하려는 집단적 노력에 가슴 깊은 곳에서의 따뜻한 공감을 보냅니다. 여튼 우리도 참사를 겪어 봤고, 그들의 참사는 규모면에서는 수백배 큰 것이니까요.




<연경, 북경,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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